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8회]
  • 관리자
  • 2010-06-04 10:36:50
  • 조회수 : 1,619
징용생활 1년 6개월은 어떤 면에서는 내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혼자 고학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만큼 사교를 몰랐으며, 내 의사를 표현하는 데도 어색한 편이었다. 그러나 징용생활에서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등 도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한 합숙소에서 집단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과 어울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나는 사투리를 고치려고 많은 신경을 썼다. 내가 평안도 사투리를 너무 심하게 써서 동무들이 놀려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자 조금은 고칠 수 있었다. 징용공 중에서는 내가 제일 어렸는데, 토오쿄오 제국대학과 쿄오토 제국대학, 도오시샤대학에 다니던 우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초반의 작업반장은 삼척경찰서의 일본인 형사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비행을 문제 삼아 일이 커지자 곧 물러나고, 군인출신인 일본인 계장이 후임 반장이 되었다. 나는 젊어서인지 무슨 일을 해도 힘들거나 피곤함을 몰랐으며, 남은 시간에는 독서를 많이 했다 최남선의 『고사통』,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그때 읽었다.

또 이광수,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의 문학작품도 접했다. 하지만 주된 공부는 척학과 수학이었다. 처음에는 통강냉이와 수수밥을 먹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콩깻묵을 먹으라고 했다. 며칠 동안 콩깻묵을 먹느라고 고생했지만, 용감한 친구들의 투쟁으로 잡곡밥이 나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은 통강냉이 맛이다.

또 징용공 중에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장기를 배웠다 장기를 가르쳐준 사람과 내기장기를 두다가 져서 밤늦게 10리나 되는 삼척 읍내까지 나가 엿장수를 깨워 외상으로 엿을 사다준 적도 있었다. 징용공들이 노동하는 시멘트공장은 삼척 읍내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어 밤길을 많이 걸었던 일과, 또 삼척은 감이 많이 나 홍시를 많이 먹은 게 기억에 남는다.

은밀히 도는 소문을 들으니 일제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우리의 일거리는 돌을 부수거나 나르는 일이었다. 징용공 중에 선반기술공이 한 명 있었는데, 그동안은 기술이 있다는 걸 얘기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장차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우리는 그의 기술을 과장하여 반장에게 말하고는 그와 다른 한 명을 선반공으로 일하게 했다.

그것은 그들을 시켜 유사시에 무기로 쓸 단도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징용공 중에는 그때 벌써 좌익사상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나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사상을 반박할 만한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다. 나는 그저 막연하게 ‘왜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데 남의 사상이 필요한가?

아직 파악되지 않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 민족이 갑자기 잘 살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혼자 바닷가에 나가 동해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고향의 부모님이 보고 싶고 누이가 풋 강냉이를 구워주던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그런 행복을 다시 누릴 수 있을까 하고 그 시절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렇게 해방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