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7회]
  • 관리자
  • 2010-06-04 10: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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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눈으로 하룻밤을 지 샌 우리는 배에 태워졌다. 3년간을 고학한 끝이 이렇듯 원하지 않는 귀국이구나 생각하니 서글펐다. 갑판 위에서 현해탄을 바라보니 바다는 넓이도 깊이도 끝이 없어 보였는데, 마치 끌려가는 우리의 운명이 바로 이 큰 바다에 뜬 작은 배처럼 생각되었다.

부산에서는 총독부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토오쿄오 경시청 관리로부터 명단과 신병을 인수받았다. 총독부 관리는 우리를 기차역으로 인솔하여 서울행 기차에 태웠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민족차별을 크게 느끼지 못했으나, 조선에 들어서자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이 강하게 다가왔다.

일본도를 찬 관리들의 오만함은 기찻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리를 멸시하고 증오하는 눈길로 바라보았으며, 지식수준이 높은 우리를 감히 건드리지는 못했으나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하루 진종일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 2월의 서울은 아직도 해동이 먼 듯 쌀쌀한 날씨였다. 역에는 군용화물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지원병 훈련소로 실어 날랐다.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집으로 보낼 수 있게 싸라.” 나는 드디어 이놈들이 우리를 강제로 군대에 보내는구나 생각하며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런들 어디 우리가 일본을 위해 싸울 사람들인가. 일본을 위해 총을 든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훈련소에서도 으레 세도깨나 부리는 집안의 실력이 나타났다.

그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면회자가 끊이지 않더니, 결국 총독부와 연이 닿는 집의 자식들은 다 빠져났다. 그동안에 우리는 기를 죽이는 훈련을 받았다. 10여일 후. 우리는 징용공으로 배치되어 두 그룹으로 갈라졌는데, 30여 명은 함경남도 천내리에 있는 시멘트공장으로 가고, 나는 나머지 25명과 함께 강원도 삼척의 시멘트공장으로 배치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고향집을 잠시 들렀다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향집으로 달려간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집안 살림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비참했다. 늙은 부모님은 세 끼 식량을 걱정하면서 기신기신 목숨을 부지하다가 나를 보자 반가움에 목이 잠겼다.

어머니는 내가 징용을 나가게 되어 식량배급을 박데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아버지는 형이 죽었을 때를 얘기하면서 내가 일본에 가 일본놈으로 바뀌지나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삼척으로 가기 위해 승호리에서 기차를 탔다. 벌써 안주 쪽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오는 징용공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싸준 것은 땅에 묻어둔 무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나는 삼척에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징용공으로 노동했다. 처음에는 나를 포함해 26명의 징용공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 둘씩 떠나더니 결국 광복을 나와 함께 맞은 사람은 8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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