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4회]
  • 관리자
  • 2010-06-04 10: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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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이 늘 머리가 아프다면서 일을 피하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된 것도 일본인 교장에게 머리를 세게 맞은 뒤부터였다. 형의 죽음이 그 일로 생긴 병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또 입증한다고 해도 당시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 교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나에게는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없었으나 곧 마음을 정리하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내 학비와 생활비는 고학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 충분히 벌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하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형이 죽기 전에 생명보험에 들어 있어 보험금이 나왔다면서, 형수와 2남 2녀의 조카들을 데려오려 한다는 편지를 다시 보내왔다.

그러면서 형수가 생활력이 강해 능히 살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형의 죽음 때문에도 그랬지만 학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법학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실망만 커질 뿐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와 맞지 않고 깊이가 없어 왠지 학문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헌법강의는 천황을 찬양하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형법강의만은 흥미가 있었는데, 그 교수의 이름이 마키노라고 기억된다. 나는 다른 강의실을 들락거리며 철학 개론이나 논리학,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돈벌이는 선배들의 말대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건장한 청장년들이 전쟁터에 나가고 없어 어디서고 노동력이 부족했다.

일용노동을 하려면 노동소개소에 나가 등록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등록을 하면 세금도 붙고 이런저런 시끄러운 일이 많았다. 때문에 나는 등록을 하지 않고 돈이 필요하면 시바우라에 있는 노동시장을 아침 일찍 찾아가 일자리를 구하곤 했다. 시장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려 어정거리고 있으면 화물차들이 오고, 인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그날 쓸 인부를 흥정했다.

“품값은 6원이다. 갈사람?” 그 액수에 만족하여 그 사람을 따라나서면 화물차를 타라고 했고, 그런 다음 화물을 싣거나 부리는 현장으로 가 하루 종일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두에서 배에 선적을 하는 일은 힘이 든 대신에 노임이 10원이었다. 나는 주로 6원을 받고 일했는데 10원을 받는 일은 딱 한 번 해보았다.

아침밥은 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대중식당에서 10전이나 20전으로 배를 채웠고, 점심식사는 건강을 생각하여 일반식당에서 먹었는데 50전이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하루 일당이면 열흘 동안의 식비가 되었다. 밥만 먹으려면 더도 말고 한 달에 세 번만 일하면 됐으나 학비와 방세에다 용돈도 필요해서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노동시장에 나가 일을 했다.

방세는 6원이었고 학비는 그보다 적었다. 용돈은 주로 책을 사는데 들어갔다. 나는 상업학교 재학시절 서울 주산대회에 아픈 몸으로 참가한 이후부터 정신을 강화하자면 육체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나름대로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조절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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