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33회]
- 관리자
- 2010-06-04 11:18:10
- 조회수 : 13,139
나의 고민은 더욱 커져 갔다. 그래서 암에 걸려 죽는 사람을 보면 나는 왜 암에도 걸리지 않는가 하고 원망했으며, 병으로 사망한 제자를 문상 가서는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부끄럽다고 말하곤 했다. 나 역시 대부분의 주민들처럼 때때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나 이놈의 세상, 빨리 끝장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었다.
1996년 2월, 인민들이 수없이 굶어죽는 가운데 김정일의 54세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주체사상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손님들의 숙소로는 대사관 영접부가 운영하는 시설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영접부의 숙소는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가까웠고, 부근에 는 호텔이 없어 모양새도 괜찮았다. 나는 주체과학원에서 일하는 어린 접대원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16~17세의 고급중학 졸업생들로서 예술적 소양이 있는 처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데려간 목적은 북한의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학생들은 접대원으로 갔기 때문에 접대원복을 입고 노래도 불렀다. 학생들은 조선노래, 러시아노래, 서양노래 할 것 없이 모두 잘 불렀다. 나이 지긋한 학자들까지 분위기에 매료된 채, 접대원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나를 찾아와 저 사람들이 정말 접대원들이 맞냐고 물어볼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모스크바의 여러 단체에서 공연을 요구해와, 결국 일곱 차례에 걸쳐 공연을 했다. 내가 이 학생들을 참가시킨 것은 주체철학을 딱딱하게 선전하지 않고 예술소조의 활동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것이었다.
접대원들의 체류비용은 국제주체재단에서 부담했으나, 기차로 오가고 대사관이 제공한 영접부 숙소를 이용하여 저렴하게 처리된 편이었다. 예술소조원들이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 토론회는 색다르게 진행되었다. 토론내용은 주로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을 비판하고 주체철학 원리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졌다. 러시아 학자들 중에 특히 모스크바 종합대학 학자들은 내가 그 대학 출신이라 하여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환대했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여러 차례 발언을 했다. 어디를 가든 교포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체철학의 원천지가 어디에 있는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아직도 물들어 있는 러시아 학자들을 각성시키는 통쾌한 연설을 해줘서 기쁘다.” 나로서는 평판이 너무 좋은 것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어쩌면 너무 큰 성공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 환상을 조성했다는 비난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러시아 주재 대사나 당 비서가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에 나쁜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갖고 있었다. 평양에 돌아오자 기분 나쁜 일이 하나 터졌다. 국제토론회에서 통역을 맡았던 김모란(1966년생)은 러시아 까잔 종합대학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주체과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토론회에 참석한 러시아 학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나와 박사원 동창생인 모스크바 종합대학의 꼬와르보 교수는 내가 95년 모스크바 국제토론회에 김모란을 데려오지 않으면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인기가 좋았으므로 우리 대표단에게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나는 김모란을 대표단에 넣었다. 그랬더니 간부부에서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러시아 유학생들이 김정일을 반대하는 조직에 가담한 혐의가 있어, 1980년 이후 졸업생은 해외출장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런 소문을 듣고는 있었다.
1996년 2월, 인민들이 수없이 굶어죽는 가운데 김정일의 54세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주체사상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손님들의 숙소로는 대사관 영접부가 운영하는 시설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영접부의 숙소는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가까웠고, 부근에 는 호텔이 없어 모양새도 괜찮았다. 나는 주체과학원에서 일하는 어린 접대원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16~17세의 고급중학 졸업생들로서 예술적 소양이 있는 처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데려간 목적은 북한의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학생들은 접대원으로 갔기 때문에 접대원복을 입고 노래도 불렀다. 학생들은 조선노래, 러시아노래, 서양노래 할 것 없이 모두 잘 불렀다. 나이 지긋한 학자들까지 분위기에 매료된 채, 접대원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나를 찾아와 저 사람들이 정말 접대원들이 맞냐고 물어볼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모스크바의 여러 단체에서 공연을 요구해와, 결국 일곱 차례에 걸쳐 공연을 했다. 내가 이 학생들을 참가시킨 것은 주체철학을 딱딱하게 선전하지 않고 예술소조의 활동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것이었다.
접대원들의 체류비용은 국제주체재단에서 부담했으나, 기차로 오가고 대사관이 제공한 영접부 숙소를 이용하여 저렴하게 처리된 편이었다. 예술소조원들이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 토론회는 색다르게 진행되었다. 토론내용은 주로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을 비판하고 주체철학 원리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졌다. 러시아 학자들 중에 특히 모스크바 종합대학 학자들은 내가 그 대학 출신이라 하여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환대했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여러 차례 발언을 했다. 어디를 가든 교포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체철학의 원천지가 어디에 있는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아직도 물들어 있는 러시아 학자들을 각성시키는 통쾌한 연설을 해줘서 기쁘다.” 나로서는 평판이 너무 좋은 것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어쩌면 너무 큰 성공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 환상을 조성했다는 비난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러시아 주재 대사나 당 비서가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에 나쁜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갖고 있었다. 평양에 돌아오자 기분 나쁜 일이 하나 터졌다. 국제토론회에서 통역을 맡았던 김모란(1966년생)은 러시아 까잔 종합대학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주체과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토론회에 참석한 러시아 학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나와 박사원 동창생인 모스크바 종합대학의 꼬와르보 교수는 내가 95년 모스크바 국제토론회에 김모란을 데려오지 않으면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인기가 좋았으므로 우리 대표단에게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나는 김모란을 대표단에 넣었다. 그랬더니 간부부에서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러시아 유학생들이 김정일을 반대하는 조직에 가담한 혐의가 있어, 1980년 이후 졸업생은 해외출장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런 소문을 듣고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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