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32회]
- 관리자
- 2010-06-04 11: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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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말경 나는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베이징에 들러 김덕홍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한 기업인들과 금강산관광문제를 협의했다. 그즈음 나는 덕홍과 만나기 위해 해외출장 때는 가능하면 베이징을 경유했다. 베이징과 평양 간은 비행기보다 주로 기차를 이용했는데, 그 이유는 선양을 거치기 위해서였다. 선양에는 재단이 운영하는 지부가 있었고, 또 우리와 긴밀히 협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평양에 돌아와 김정일에게 북한의 경제는 관강업을 발전시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경제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서 강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그런데 밑천을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그 주사약이 바로 금강산개발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남한 기업가는 북한이 금강산 근처에 자유관광단지를 내놓으면 시실은 남한측이 조립식으로 6개월 내에 건설하겠다고 제의했다.
관광객은 속초에서 배로 수송하며, 관광객 일인당 2백 불 정도의 입산료를 내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 계획의 골자였다. 게다가 금강산과 묘향산, 백두산에서의 관광에 관한 모든 절차 역시 북한측 요구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측은 아무런 투자 없이 연간 10억 불 가량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나는 이 내용을 김정일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그 일이 성사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것이 내가 김정일에게 한 마지막 건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비서들이 제기하지 못하는 것을 적지 않게 제기해왔다. 이를테면 조직부의 독무대가 되지 않도록 서로 견제하는 사업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것, 서기실을 5명 정도로 꾸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비준문건을 모두 함께 검토하여 중복을 피하게 해야 하며,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과 지시도 서기실에서 함께 검토하여 아래 실정에 맞지 않은 것은 의견을 달아 재보고하게 해야 한다는 것,
서기실에 실장제를 두지 말고 5명을 동격으로 하여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 중앙당 각 부서는 부서이기주의가 심하고 그에 따른 허위보고가 많다는 것, 경제분야에 도급제를 도입하여 일한 것만큼 분배해주는 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는 것 등 적지 않은 의견을 제기했으나, 김정일은 생각해보겠다고만 하고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또 과오를 범한 간부들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재임용해야 한다고 제기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관광문제를 너무 강력하게 제기하자, 김정일은 시안을 작성해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인민무력부, 국가보위부, 관광총국의 간부들과 협의했다. 인민무력부는 이견이 없다고 했으며, 국가보위부는 관광버스의 운행과 안내를 전부 보위부 요원들이 담당하며, 관광객들에 대한 세뇌교육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의 안전에 지장이 없도록 시안을 만들어 보고했다. 통일전선부나 대외경제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관광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해왔으나 올릴 때마다 기각 당했는데, 이번에는 국제비서가 이론적으로 논거를 세워 보고했으니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희망을 걸었다.
그들은 그 결과가 알고 싶어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나 역시 성사 여부가 궁금했으나 김정일이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 서기실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관광개발 시안에 대해 물어봤다. “왜 그런 걸 올렸습니까? 관광을 허용하는 것은 곧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우리 경제가 완전히 마비될 텐데,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란 말이오.”
“모르셨습니까? 벌써 완전 마비상태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려고 해도 식량이 문제고, 또 남조선을 점령한 다음이 걱정되어 위에서도 (김정일)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김정일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충고나 의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평양에 돌아와 김정일에게 북한의 경제는 관강업을 발전시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경제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서 강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그런데 밑천을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그 주사약이 바로 금강산개발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남한 기업가는 북한이 금강산 근처에 자유관광단지를 내놓으면 시실은 남한측이 조립식으로 6개월 내에 건설하겠다고 제의했다.
관광객은 속초에서 배로 수송하며, 관광객 일인당 2백 불 정도의 입산료를 내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 계획의 골자였다. 게다가 금강산과 묘향산, 백두산에서의 관광에 관한 모든 절차 역시 북한측 요구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측은 아무런 투자 없이 연간 10억 불 가량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나는 이 내용을 김정일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그 일이 성사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것이 내가 김정일에게 한 마지막 건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비서들이 제기하지 못하는 것을 적지 않게 제기해왔다. 이를테면 조직부의 독무대가 되지 않도록 서로 견제하는 사업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것, 서기실을 5명 정도로 꾸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비준문건을 모두 함께 검토하여 중복을 피하게 해야 하며,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과 지시도 서기실에서 함께 검토하여 아래 실정에 맞지 않은 것은 의견을 달아 재보고하게 해야 한다는 것,
서기실에 실장제를 두지 말고 5명을 동격으로 하여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 중앙당 각 부서는 부서이기주의가 심하고 그에 따른 허위보고가 많다는 것, 경제분야에 도급제를 도입하여 일한 것만큼 분배해주는 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는 것 등 적지 않은 의견을 제기했으나, 김정일은 생각해보겠다고만 하고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또 과오를 범한 간부들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재임용해야 한다고 제기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관광문제를 너무 강력하게 제기하자, 김정일은 시안을 작성해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인민무력부, 국가보위부, 관광총국의 간부들과 협의했다. 인민무력부는 이견이 없다고 했으며, 국가보위부는 관광버스의 운행과 안내를 전부 보위부 요원들이 담당하며, 관광객들에 대한 세뇌교육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의 안전에 지장이 없도록 시안을 만들어 보고했다. 통일전선부나 대외경제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관광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해왔으나 올릴 때마다 기각 당했는데, 이번에는 국제비서가 이론적으로 논거를 세워 보고했으니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희망을 걸었다.
그들은 그 결과가 알고 싶어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나 역시 성사 여부가 궁금했으나 김정일이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 서기실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관광개발 시안에 대해 물어봤다. “왜 그런 걸 올렸습니까? 관광을 허용하는 것은 곧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우리 경제가 완전히 마비될 텐데,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란 말이오.”
“모르셨습니까? 벌써 완전 마비상태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려고 해도 식량이 문제고, 또 남조선을 점령한 다음이 걱정되어 위에서도 (김정일)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김정일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충고나 의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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