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28회]
- 관리자
- 2010-06-04 11:16:17
- 조회수 : 13,115
나는 외화를 벌려면 국가보위부를 끼고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국가보위부가 우리의 외화벌이를 적극적으로 돕도록 김정일의 비준을 받았다. 세계 각국의 주체사상 선전기지를 한데 묶어 사업을 하려면 국제재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주체재단’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출연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금을 걱정하고 있는데, 우연히 주체사상 신봉자인 라오스의 한 젊은 사업가가 백만 불을 무이자에 무기한으로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결국 그 사업가를 재단총재로 해서 이사장에는 내가, 그리고 김덕홍을 재정책임자로 하여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주체재단을 등록했다. 내가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주체사상 선전을 김정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해보려는 취지에서였다.
나는 김덕홍을 통해 종래의 주체사상 선전물과는 다른 선전물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만일 검열에 걸려도 기업가나 종교가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도록 우상화 선전이나 계급투쟁선전 부분을 빼버린 내용이었다. 이 홍보물들은 금세 효과를 나타내어, 우리는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김정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첫 수입금 80만 불에서 50만 불을 바쳤다. 김정일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김정일은 간부들과의 회식자리에서
“황 비서는 순전히 주체사상을 팔아 500만 불을 벌어 당에 바쳤는데 당신들은 뭘 하고 앉아 뭉개고 있는가?” 라며 50만 불을 500만 불로 둔갑시켜 호통을 쳤다고 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간부들이 나를 찾아와 어떻게 500만 불을 벌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았고, 더구나 총리는 제발 30만 불만 빌려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중앙당 부서 산하기관들 중에 외화벌이를 하는 유령회사들은 있어도, 중앙당 기관이 직접 운영하는 외화벌이 회사는 전혀 없었다.
그것을 국제비서인 내가 직접 관리하다 보니 해외교포들도 적극 나서서 도와주었다. 비밀을 유지하려고는 했지만 소문이 국내에 빠르게 퍼져, 김덕홍에게 물건을 사다달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비서들도 나에게 약이나 북한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 사업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내게 직속되어 있는 비밀 부서인 자료연구실에 5명 규모의 ‘재단담당 분실’을 만들어 김덕홍을 자료연구실 부실장이 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김덕홍의 자리는 월급으로 보면 정무원 부부장급과 비슷했으나, 당 간부로서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신분이면 어느 기관이나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덕홍은 내가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교무부를 책임진 채 대학실무를 총괄했다. 그는 사회안전부에 근무한 적도 있어 사회안전부 계통 사람들이나 보위부, 무력부 쪽 사람들과도 관계가 깊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대학관리를 위해서도 중용했는데, 사회안전부나 보위부와 협조할 일이 있으면 그를 앞세워 일을 해결했다.
또 내가 중앙당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를 중앙당 지도원으로 불렀었다. 덕홍이 맡은 사업 중에서 평성의 주체과학원 보조청사 건립사업은 다행이 그가 맡은 덕에 아무런 잡음 없이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내게는 서기가 두 명이나 있었으나, 나는 덕홍을 가장 믿었다. 나는 서기들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서슴없이 덕홍에게 부탁하곤 했다. 나와 덕홍이 그토록 친했던 만큼, 자연스레 아들 경모도 그를 삼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금을 걱정하고 있는데, 우연히 주체사상 신봉자인 라오스의 한 젊은 사업가가 백만 불을 무이자에 무기한으로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결국 그 사업가를 재단총재로 해서 이사장에는 내가, 그리고 김덕홍을 재정책임자로 하여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주체재단을 등록했다. 내가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주체사상 선전을 김정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해보려는 취지에서였다.
나는 김덕홍을 통해 종래의 주체사상 선전물과는 다른 선전물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만일 검열에 걸려도 기업가나 종교가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도록 우상화 선전이나 계급투쟁선전 부분을 빼버린 내용이었다. 이 홍보물들은 금세 효과를 나타내어, 우리는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김정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첫 수입금 80만 불에서 50만 불을 바쳤다. 김정일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김정일은 간부들과의 회식자리에서
“황 비서는 순전히 주체사상을 팔아 500만 불을 벌어 당에 바쳤는데 당신들은 뭘 하고 앉아 뭉개고 있는가?” 라며 50만 불을 500만 불로 둔갑시켜 호통을 쳤다고 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간부들이 나를 찾아와 어떻게 500만 불을 벌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았고, 더구나 총리는 제발 30만 불만 빌려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중앙당 부서 산하기관들 중에 외화벌이를 하는 유령회사들은 있어도, 중앙당 기관이 직접 운영하는 외화벌이 회사는 전혀 없었다.
그것을 국제비서인 내가 직접 관리하다 보니 해외교포들도 적극 나서서 도와주었다. 비밀을 유지하려고는 했지만 소문이 국내에 빠르게 퍼져, 김덕홍에게 물건을 사다달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비서들도 나에게 약이나 북한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 사업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내게 직속되어 있는 비밀 부서인 자료연구실에 5명 규모의 ‘재단담당 분실’을 만들어 김덕홍을 자료연구실 부실장이 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김덕홍의 자리는 월급으로 보면 정무원 부부장급과 비슷했으나, 당 간부로서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신분이면 어느 기관이나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덕홍은 내가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교무부를 책임진 채 대학실무를 총괄했다. 그는 사회안전부에 근무한 적도 있어 사회안전부 계통 사람들이나 보위부, 무력부 쪽 사람들과도 관계가 깊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대학관리를 위해서도 중용했는데, 사회안전부나 보위부와 협조할 일이 있으면 그를 앞세워 일을 해결했다.
또 내가 중앙당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를 중앙당 지도원으로 불렀었다. 덕홍이 맡은 사업 중에서 평성의 주체과학원 보조청사 건립사업은 다행이 그가 맡은 덕에 아무런 잡음 없이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내게는 서기가 두 명이나 있었으나, 나는 덕홍을 가장 믿었다. 나는 서기들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서슴없이 덕홍에게 부탁하곤 했다. 나와 덕홍이 그토록 친했던 만큼, 자연스레 아들 경모도 그를 삼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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