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26회]
  • 관리자
  • 2010-06-04 1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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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이따금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는 많은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비서들의 좌상인 황 비서의 의견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언제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김경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아첨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심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오빠는 고독해합니다.

” 나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한 옛일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변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7월 20일에 김정일이 전화로 말한 내용을 이론적으로 품위 있게 정리하여 그의 이름으로 비준을 받아 정식문건으로 채택했다. 나로서는 김일성이 죽었으니 김정일의 마음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김정일은 권력승계 문제를 묘하게 질질 끌어왔다. 인민들은 김일성이 죽고 나자 더 열심히 일했다.

한번은 황해남도에 농사가 잘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간부들과 함께 나가 보니, 농사는 잘되었지만 사는 게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농민들의 부엌에는 밥 먹을 그릇과 심지어 수저도 모자랄 정도였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농민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없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가슴이 아팠다. 당은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는 문제와 김일성 동상에 꽃을 바치는 문제로 떠들썩할 뿐,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누구 한사람 공식적으로 제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밤에는 간부들이 김일성동상을 교대로 지켜야 했다. 나는 감기에 걸린 상태였지만 배당이 되어 있어 밤중에 한 시간을 겨우 서고 들어왔다.

어떤 간부들은 밤을 꼬박 새우면서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런 일을 당이 낱낱이 조사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고, 본부당 회의에서 공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보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병원에 입원중이어서 나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에 관계없이 처벌을 받은 사실이었다. 주체과학원의 한 유능한 박사는 김일성이 죽었는데도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었다는 구실로 철직 당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울기 경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한 두 번이라면 몰라도 눈물이 계속 나올리 없었다.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우는 시늉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김일성의 시신을 참배하거나 동상에 꽃을 바쳐야 했다.

물로 그 중에는 진짜로 우는 사람도 있었다. 당이 선전하는 것을 모조리 믿어온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이 죽은 7월 8일을 기념하여 매월 8일이면 모든 직장에서 직장이 없는 사람들은 온 가족을 이끌고 동상에 꽃을 바치러 나섰다. 더구나 죽은 지 백일이 된 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길거리라 막힐 지경이었다. 외국출장을 갈 때도 먼저 동상에 꽃부터 바치고, 외국사람이 오면 비행장에서 동상이 있는 곳으로 곧장 데려와 꽃을 올리게 했다. 내 눈에는 이 모든 짓거리들이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쳐도 이만저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인민들은 끼니를 굶고 있는데 언제까지 동상에 꽃을 바치는 놀음을 계속해야 성이 찰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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