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5회]
  • 관리자
  • 2010-06-04 10:31:42
  • 조회수 : 1,527
아버지는 서당 훈장과 농사일 외에도 당시로서는 드문 양봉을 쳤다. 열다섯 통쯤이라고 기억되는데, 그 덕택에 다른 집에서는 귀한 꿀을 우리 식구들은 필요할 때 쓸 수 있었다. 어머니는 기억력이 보통 좋으신 분이 아니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이 외우고 동네 아이들의 생일을 대부분 기억할 정도였다. 게다가 인정도 남달라서 동네 아이들의 생일날 아침에는 늘 어머니에게 동네 개 물 안 먹는 것까지 걱정한다고 놀려줄 때가 많았다.

형은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수려한 편이었다. 그러나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 나와 달리 인정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은 의협심이 강하고 자존심 또한 대단했으나, 한 가지 흠은 자잘한 일에 신경질을 낸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외모에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 평생 한 우물을 파면서도 지루한 줄을 모르는 철학자형 인간이었다.

적어도 북녘 땅을 떠날 때까지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 역시 큰 후회도 부담도 없는 삶을 지향해왔다. 형은 광주학생사건 당시 미림보통학교 6학년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한 혐의로 교사들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렀다. 그 와중에 일본인 장교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다고 한다.

형은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고도 후유증으로 몇 년을 더 고생했는데, 심할 때는 며칠씩 누워 움직이지도 못했다. 젊디젊은 나이로 죽기까지 형은 늘 두통에 시달렸는데, 결국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병을 앓다가 내가 토오쿄오에서 대학을 다닐 때 죽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로는 형을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보내준 후원에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혈육4의 따스한 정 표시 한 번 못 했던 터라, 그렇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우리 두 형제는 자존심이 남달리 강하다는 것 말고는 외모가 다르듯이 성격 또한 확연히 달랐다.

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양도 서로 달랐다. 어머니는 늘 형을 감싸고 돌았고, 아버지는 나를 형과는 상대가 안된다면서 높이 평가하고 극진히 아꼈다. 아버지는 또 둘째누이를 영리하고 똑똑하다면서 사랑했다. 둘째누이는 학교나 서당에 다닌 적이 없는데도 형과 나의 어깨너머로 배워 국문은 물론 일본어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영특했다. 그 누이도 나를 아꼈고 나도 둘째누이를 맏누이보다 좋아했다.

형은 그런 나와 둘째누이를 자주 때리면서 못살게 굴었다. 둘째누이와 나는 형에게 대들지는 못했지만 보대낌을 덜 당하기 위해 힘을 합치고는 했다. 어려서 그랬겠지만, 둘째누이와 나는 형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다. 당시 겨울은 지루한 계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을 먹기 무섭게 마실을 다녔는데, 주로 우리 집으로 모였다. 오지 않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소문난 투전꾼들뿐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