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4회]
- 관리자
- 2010-06-04 10: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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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내 고향 삼청동
나는 1923년 1월 23일(음력 1922년 12월 7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신고를 늦게 하여 호적에는 1923년 2월 17일로 등재되었다. 아버지 황병덕은 평안남도 대동군 청룡면 이현리에서 출생하여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1910년 강동군 광청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고 학동을 받아 한문을 가르치면서 식구들을 부양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이덕화이며, 평양시 교외의 고방산 노화동 태생이었다. 나를 낳을 당시 아버지는 41세, 어머니는 46세였다. 증조부와 외조부는 한학자였는데, 서로 친분이 두터워 사돈을 맺었다고 한다. 조부 황유문은 증조부의 3남이었다. 아버지는 삼청동으로 살림을 나왔지만 조부는 백부 황병헌과 함께 이현리에 눌러 살았다.
맏누이의 이름은 황승조로 1908년생이었다. 그러나 누이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사망했고, 매부 왕훈병은 4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탄광노동자였다. 형 황승엽(황승길이라고도 불렸다)은 1913년생으로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역 급사를 거쳐 보험회사 사무원으로 있다가 1942년에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둘째누이 황길조는 1915년생으로 1996년에 죽었는데, 매부 김종환은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후 화물차 운전기사를 하다가 6.25때 단신 월남했다.
내 유년의 추억이 잔뜩 서린 광청리 삼청동은 20여 호가 모여 사는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우리 집은 두 번째 부자로 통했는데, 가장 낫다는 집이 우리 바로 앞집 임씨네였다. 그 집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이층집이기도 했다. 우리가 경작하던 밭은 2천 평가량이었는데, 아버지의 생가가 있던 이현리에 아버지 명의로 된 밭이 또 있었다.
그 밭은 삼촌이 경작하면서 조부모님을 모셨는데, 매년 추수철이 되면 김장할 배추나 무와 겨울을 날 식량을 삼촌이 가져오곤 했다. 형은 승호리의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림에 있는 6년제 보통학교를 더 다녔다. 집에서 미림까지는 20리가 넘어, 형은 학교에 가자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늘 새벽에 조반을 지었고, 그래서 식구들의 아침식사도 다른 집보다 일렀다.
아버지는 나를 다른 아이들처럼 보통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다섯 살 때부터 당신의 서당에서 ‘통감’2권까지 가르쳤다.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얘기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먼저 한문을 배우는 것이 좋다면서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은 못했으나 담배는 즐겨 피웠다. 그래서 당시 법으로 금지된 담배를 산에 몰래 심었다가 가을에 은밀히 거두어 오기도 하고, 그 잎담배가 떨어지면 ‘희연’이라는 이름의 봉지담배를 사서 피우기도 했다.
나는 1923년 1월 23일(음력 1922년 12월 7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신고를 늦게 하여 호적에는 1923년 2월 17일로 등재되었다. 아버지 황병덕은 평안남도 대동군 청룡면 이현리에서 출생하여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1910년 강동군 광청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고 학동을 받아 한문을 가르치면서 식구들을 부양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이덕화이며, 평양시 교외의 고방산 노화동 태생이었다. 나를 낳을 당시 아버지는 41세, 어머니는 46세였다. 증조부와 외조부는 한학자였는데, 서로 친분이 두터워 사돈을 맺었다고 한다. 조부 황유문은 증조부의 3남이었다. 아버지는 삼청동으로 살림을 나왔지만 조부는 백부 황병헌과 함께 이현리에 눌러 살았다.
맏누이의 이름은 황승조로 1908년생이었다. 그러나 누이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사망했고, 매부 왕훈병은 4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탄광노동자였다. 형 황승엽(황승길이라고도 불렸다)은 1913년생으로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역 급사를 거쳐 보험회사 사무원으로 있다가 1942년에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둘째누이 황길조는 1915년생으로 1996년에 죽었는데, 매부 김종환은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후 화물차 운전기사를 하다가 6.25때 단신 월남했다.
내 유년의 추억이 잔뜩 서린 광청리 삼청동은 20여 호가 모여 사는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우리 집은 두 번째 부자로 통했는데, 가장 낫다는 집이 우리 바로 앞집 임씨네였다. 그 집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이층집이기도 했다. 우리가 경작하던 밭은 2천 평가량이었는데, 아버지의 생가가 있던 이현리에 아버지 명의로 된 밭이 또 있었다.
그 밭은 삼촌이 경작하면서 조부모님을 모셨는데, 매년 추수철이 되면 김장할 배추나 무와 겨울을 날 식량을 삼촌이 가져오곤 했다. 형은 승호리의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림에 있는 6년제 보통학교를 더 다녔다. 집에서 미림까지는 20리가 넘어, 형은 학교에 가자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늘 새벽에 조반을 지었고, 그래서 식구들의 아침식사도 다른 집보다 일렀다.
아버지는 나를 다른 아이들처럼 보통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다섯 살 때부터 당신의 서당에서 ‘통감’2권까지 가르쳤다.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얘기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먼저 한문을 배우는 것이 좋다면서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은 못했으나 담배는 즐겨 피웠다. 그래서 당시 법으로 금지된 담배를 산에 몰래 심었다가 가을에 은밀히 거두어 오기도 하고, 그 잎담배가 떨어지면 ‘희연’이라는 이름의 봉지담배를 사서 피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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