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1회]
  • 관리자
  • 2010-06-04 10: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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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첸치천 중국외교부장이 우리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후 국제법과 국제관련에 따라, 그리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도록 처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이어 한국정부는 나와 김덕홍을 1개월 이상 제3국에 체류시킬 것이라고 중국측에 통보했다. 3월 14일, 중국의 리펑 총리는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사건과 관련한 중국의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피가 마르는듯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았고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었다. 3월 15일, 한국정부와 중국정부의 협상팀이 우리를 필리핀으로 이송하는 데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우리를 위로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 말은 물론 옳다. 나도 그걸 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중국정부의 배려로 나와 김덕홍은 1997년 3월 18일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다. 베이징에 있으나 필리핀에 있으나 가족과 떨어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베이징에 있을 때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 생사도 알 길 없는 가족들이 평양과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다소나마 위안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다 건너 먼 필리핀으로 떠나야 한다고 하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져 마치 온몸을 면도칼로 그어대는 것 같았다. 그런 고통 속에서 나는 두 번 죽더라도, 가족을 모두 희생시키더라도, 인민을 무참히 굶겨 죽이고 자신의 더러운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의 운명을 마음대로 우롱하는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을 반드시 타도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지난날들과 달리,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하는 우려가 생기기 시작했다.

맏딸은 내가 개척한 사상을 가지고 역사에 길이 남을 근사한 문학작품을 쓰고 죽겠다고 늘 말해왔고, 둘째딸은 면역학 연구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앞날이 유망한 그들의 희망을 짓밟은 채, 그들 모두가 이룰 수 있는 일을 합친 것보다 더욱 소중한 일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 행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평양에서 목숨을 끊는 것보다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짓눌러왔다.

게다가 민족을 위한 소임도 다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다면 죄는 더 커지지 않겠는가 하는 따위의 잡다한 생각들로 나는 줄곧 괴로웠다. 그 괴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이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렇다. 기왕에 김정일의 마수를 피했으니 살아서 그가 망하는 걸 보자.’ 마음을 정리하고 나서 우리는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는데도, 나는 곧 안절부절못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무거운 내 마음을 과연 비행기가 실어 나를 수 있을까. 그러면서 문득 이 마당에 무슨 시라도 쓰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부끄러운 기분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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