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0회]
- 관리자
- 2010-06-04 10:29:51
- 조회수 : 1,662
늘 그래왔지만 글을 쓰는 시간만은 모든 잡념을 걷어내고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의사에게 잠약을 날마다 주문했고, 의사는 수면제를 계속 복용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면서 약을 주기를 꺼렸다. 하지만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바라건대 1년만 살면 된다면서 의사를 졸라 수면제를 얻어내고는 했다.
북한은 나와 덕홍을 강제로 탈환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로 납치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2월 17일, ‘변절자는 갈테면 가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나는 민족을 배반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이라고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나를 갈테면 가라고 한 날은 나의 74회 생일이었다.
대사관측에서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걸 안 나는 곧 중지해줄 것을 부탁했다. “성의는 고맙지만 가족들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무슨 파팁니까. 파티준비를 그만 두십시오. 생일잔치를 벌이면 더 괴로울 뿐입니다.” 그러자 덕홍이 내게 말했다. “형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가족까지 희생시키며 내리신 결단에 존경을 표하며 저는 관포지교의 정신으로 이 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덕홍이. 자네의 그 말은 어떤 화려한 생일파티보다도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 같네. 기왕에 왔으니 우리가 바라던 일은 기필코 성사된다는 신념을 갖고 마음을 굳게 다지자구.” “형님.....” 그때까지 나는 망명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내가 북한체제를 지지할 때는 북한을 주체로 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꿈꾸었지만, 그때도 나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북한 전체를 조국으로 알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한통치자들과 그 체제를 반대하고 남한으로 넘어온 지금, 남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북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남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할 것인가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하는 데는 우리 민족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내 조국의 북쪽 땅으로부터 남쪽 땅으로 넘어오는 걸 왜 하필이면 망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내게는 그게 불만이었다.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로 가야 망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상으로 남북이 두 개의 주권국가로 되어 있는 까닭에 망명이라고 해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여, 나는 몹시 불만스럽지만 내가 망명했다고 하는 걸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덩샤오핑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중국의 흐루시초프 같은 변절자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욕을 해대었지만, 나는 덩샤오핑이야말로 소련과 같은 길을 가는 중국을 구원한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국상을 당한 중국의 친한 벗들과 슬픔을 같이 나누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내가 국제비서로서 평양에 있었다면 어떻게 달래든 김정일을 중국대사관으로 조문 보냈을 것이다. 며칠 후 들리는 말로 김정일은 조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김정일이 분별없고 도리도 모르는 굴레 벗은 망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나와 덕홍을 강제로 탈환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로 납치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2월 17일, ‘변절자는 갈테면 가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나는 민족을 배반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이라고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나를 갈테면 가라고 한 날은 나의 74회 생일이었다.
대사관측에서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걸 안 나는 곧 중지해줄 것을 부탁했다. “성의는 고맙지만 가족들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무슨 파팁니까. 파티준비를 그만 두십시오. 생일잔치를 벌이면 더 괴로울 뿐입니다.” 그러자 덕홍이 내게 말했다. “형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가족까지 희생시키며 내리신 결단에 존경을 표하며 저는 관포지교의 정신으로 이 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덕홍이. 자네의 그 말은 어떤 화려한 생일파티보다도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 같네. 기왕에 왔으니 우리가 바라던 일은 기필코 성사된다는 신념을 갖고 마음을 굳게 다지자구.” “형님.....” 그때까지 나는 망명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내가 북한체제를 지지할 때는 북한을 주체로 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꿈꾸었지만, 그때도 나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북한 전체를 조국으로 알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한통치자들과 그 체제를 반대하고 남한으로 넘어온 지금, 남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북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남한을 주체로 하여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할 것인가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 조선을 내 조국으로 생각하는 데는 우리 민족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내 조국의 북쪽 땅으로부터 남쪽 땅으로 넘어오는 걸 왜 하필이면 망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내게는 그게 불만이었다.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로 가야 망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상으로 남북이 두 개의 주권국가로 되어 있는 까닭에 망명이라고 해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여, 나는 몹시 불만스럽지만 내가 망명했다고 하는 걸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덩샤오핑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중국의 흐루시초프 같은 변절자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욕을 해대었지만, 나는 덩샤오핑이야말로 소련과 같은 길을 가는 중국을 구원한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국상을 당한 중국의 친한 벗들과 슬픔을 같이 나누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내가 국제비서로서 평양에 있었다면 어떻게 달래든 김정일을 중국대사관으로 조문 보냈을 것이다. 며칠 후 들리는 말로 김정일은 조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김정일이 분별없고 도리도 모르는 굴레 벗은 망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