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4회]
- 관리자
- 2010-06-04 11: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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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여자 교장이 이끄는 인민학교가 있었는데, 학생들과 선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도와주어, 그녀의 그런 기풍이 학교에 넘쳐흘렀다.
학교는 늘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몇 해 동안 유리가 한 장도 깨지지 않을 만큼 학생들이 모범적이었다. 교사들도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한 여선생의 남편이 국가기관의 간부였던 관계로 그때까지 살던 집보다 훨씬 좋은 주택을 배정 받았다. 그런데 새로 배정받은 주택이 학교에서 너무 멀어, 학교에 출근하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대동교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그 여교장과 동료 선생들이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전근을 하라고 권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싫다고 하다가 교장선생과 동료들의 권요를 받아들여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옮겼는데, 결국 두 달도 안 되어 다시 예전의 학교로 돌아 왔다. 아무리 출퇴근이 불편해도 정든 교장선생과 가정처럼 화목하게 단합되어 있는 집단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게 돌아온 이유였다.
훗날 나는 과학교육비서를 그만둔 뒤 10년쯤 지나 그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학교 선생들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한번은 교장이 앓아누워 피를 많이 쏟았다는 소식을 들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병원으로 달려가 자신들의 피를 뽑아달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사진을 이웠다는 것이었다. 그 교장선생은 40여 년간 인민학교 교장을 하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키웠다.
학교의 사정이 이런데도 당에서는 나에게 학교에서 보이는 문제점을 종합하여 교육자들을 비판하는 회의를 자주 열 것을 요구했다. 나는 마지못해 비판회의를 열기는 했으나, 오히려 모범적인 교육자들의 아름다운 일화를 소개하고 그 모범을 따라 배우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규교과과정 내에 노력동원과 군사훈련,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정치행사 등 예정되지 않은 행사가 너무 많아 교육이 자주 중단되었다.
이런 여건에서도 나는 교원들이 중요과목의 교육에 힘을 집중할 수 있도록 애썼다. 보통교육에서는 수학교육이 후대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수학교육의 발전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쏟도록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입장은 훗날 좌경분자들에 의해 수령 우상화교육을 약화시키고 기술실무교육에 치중했다는 비난을 초래했다. 5년제 대학에서 실제로 공부한 기간을 조사해 보았더니 2년 반도 안 되었다.
게다가 그 2년 반 동안에도 교과과정이 자주 중단되어 학생들의 사고발전에 차질이 생겼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해보려고 고안해낸 것이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이었다. 나는 이 학습방법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항일유격대가 행군하면서도 학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온 이름이었다. 대학총장 시절 사회과학 계통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해 과외 이론세미나를 조직하고 학급간에 경쟁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 경쟁에서 많은 학급이 중도에서 탈락하고 마지막에 철학과 4학년과 법학부 국가건설과(정치학과) 4학년만이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추수동원령이 내려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최종 결승을 추수동원이 끝나고 돌아온 뒤에 다시 경쟁토론을 계속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학교는 늘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몇 해 동안 유리가 한 장도 깨지지 않을 만큼 학생들이 모범적이었다. 교사들도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한 여선생의 남편이 국가기관의 간부였던 관계로 그때까지 살던 집보다 훨씬 좋은 주택을 배정 받았다. 그런데 새로 배정받은 주택이 학교에서 너무 멀어, 학교에 출근하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대동교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그 여교장과 동료 선생들이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전근을 하라고 권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싫다고 하다가 교장선생과 동료들의 권요를 받아들여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옮겼는데, 결국 두 달도 안 되어 다시 예전의 학교로 돌아 왔다. 아무리 출퇴근이 불편해도 정든 교장선생과 가정처럼 화목하게 단합되어 있는 집단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게 돌아온 이유였다.
훗날 나는 과학교육비서를 그만둔 뒤 10년쯤 지나 그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학교 선생들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한번은 교장이 앓아누워 피를 많이 쏟았다는 소식을 들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병원으로 달려가 자신들의 피를 뽑아달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사진을 이웠다는 것이었다. 그 교장선생은 40여 년간 인민학교 교장을 하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키웠다.
학교의 사정이 이런데도 당에서는 나에게 학교에서 보이는 문제점을 종합하여 교육자들을 비판하는 회의를 자주 열 것을 요구했다. 나는 마지못해 비판회의를 열기는 했으나, 오히려 모범적인 교육자들의 아름다운 일화를 소개하고 그 모범을 따라 배우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규교과과정 내에 노력동원과 군사훈련,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정치행사 등 예정되지 않은 행사가 너무 많아 교육이 자주 중단되었다.
이런 여건에서도 나는 교원들이 중요과목의 교육에 힘을 집중할 수 있도록 애썼다. 보통교육에서는 수학교육이 후대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수학교육의 발전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쏟도록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입장은 훗날 좌경분자들에 의해 수령 우상화교육을 약화시키고 기술실무교육에 치중했다는 비난을 초래했다. 5년제 대학에서 실제로 공부한 기간을 조사해 보았더니 2년 반도 안 되었다.
게다가 그 2년 반 동안에도 교과과정이 자주 중단되어 학생들의 사고발전에 차질이 생겼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해보려고 고안해낸 것이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이었다. 나는 이 학습방법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항일유격대가 행군하면서도 학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온 이름이었다. 대학총장 시절 사회과학 계통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해 과외 이론세미나를 조직하고 학급간에 경쟁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 경쟁에서 많은 학급이 중도에서 탈락하고 마지막에 철학과 4학년과 법학부 국가건설과(정치학과) 4학년만이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추수동원령이 내려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최종 결승을 추수동원이 끝나고 돌아온 뒤에 다시 경쟁토론을 계속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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