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75회]
- 관리자
- 2010-06-04 10:5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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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을 회복하다
1968년 5.25교시 총화가 다 끝나가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아파트 앞마당을 쓸다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당에서는 서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쫓겨난 것이 수령님의 권위에 해가 된다고 하여 황 총장의 과오도 다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돌고 있소. 그러니 좀 더 기다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소.”
그 말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밤늦게 김일성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긴장된 기분으로 그이 말을 들었다. “나는 동무가 오랫동안 내 가까이서 일을 해왔기 때문에 혁명적 세계관이 서 있는 줄 알았소. 그래서 독립적으로 일을 해보라고 총장의 중책을 맡겼는데, 아직 혁명적 세계관이 잘 서 있는 것 같지 않소. 뭣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논문을 써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는가 말이오.” “죄송합니다.”
나는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것저것 잡다하게 물어보더니 덧붙였다. “죄송하다? 알았으면 됐어. 앞으로 서기실에 있던 동무들을 다시 등용해 쓰려고 하오. 그리고 장인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박승옥 동무도 다시 직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시오.”그 후 김일성은 연설이 있을 때마다 나를 특별히 불러 참석시켰다. 그리고 밤늦게라도 전화를 걸어 연설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일성을 충실히 돕는 길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68년 12월 31일 저녁에 문수리 초대소로 급히 오라는 김정일의 전갈이 있었다. 나는 마침 학생들의 식당을 둘어보고 있었는데, 당 위원회 지도원이 달려와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입이 헐어 있었고, 옷차림도 초라했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그대로 서둘러 문수리 초대소로 갔다. 김정일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장선생 어서 오시오. 간부들과 함께 수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정일을 따라 김일성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논문 사건 이후로 김일성을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김일성은 환히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최용건과 김일 등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의 연회는 신년연회인데 본래 나는 참석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이 지시하여 참가시켰다고 주변에서 말해주었다. 누가 김일성을 설득하여 나를 구원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기실에는 나까지 네 명이 근무했었다. 나는 학교로, 한 명은 교육상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직되고, 실장은 지방으로 쫓겨 갔다가 복직되었다.
나머지 한 명은 사회과학원으로 배치되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로 서기실은 하나의 부서가 되어 적지 않은 인원이 근무하게 되었다. 1970년 10월 초순, 나는 사상개조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은 성과와 교훈에 대해 보고하고 싶다는 이유를 달아 김일성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10월 20일 아침 집무실에서 나를 만나주었다.
1968년 5.25교시 총화가 다 끝나가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아파트 앞마당을 쓸다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당에서는 서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쫓겨난 것이 수령님의 권위에 해가 된다고 하여 황 총장의 과오도 다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돌고 있소. 그러니 좀 더 기다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소.”
그 말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밤늦게 김일성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긴장된 기분으로 그이 말을 들었다. “나는 동무가 오랫동안 내 가까이서 일을 해왔기 때문에 혁명적 세계관이 서 있는 줄 알았소. 그래서 독립적으로 일을 해보라고 총장의 중책을 맡겼는데, 아직 혁명적 세계관이 잘 서 있는 것 같지 않소. 뭣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논문을 써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는가 말이오.” “죄송합니다.”
나는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것저것 잡다하게 물어보더니 덧붙였다. “죄송하다? 알았으면 됐어. 앞으로 서기실에 있던 동무들을 다시 등용해 쓰려고 하오. 그리고 장인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박승옥 동무도 다시 직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시오.”그 후 김일성은 연설이 있을 때마다 나를 특별히 불러 참석시켰다. 그리고 밤늦게라도 전화를 걸어 연설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일성을 충실히 돕는 길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68년 12월 31일 저녁에 문수리 초대소로 급히 오라는 김정일의 전갈이 있었다. 나는 마침 학생들의 식당을 둘어보고 있었는데, 당 위원회 지도원이 달려와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입이 헐어 있었고, 옷차림도 초라했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그대로 서둘러 문수리 초대소로 갔다. 김정일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장선생 어서 오시오. 간부들과 함께 수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정일을 따라 김일성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논문 사건 이후로 김일성을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김일성은 환히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최용건과 김일 등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의 연회는 신년연회인데 본래 나는 참석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이 지시하여 참가시켰다고 주변에서 말해주었다. 누가 김일성을 설득하여 나를 구원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기실에는 나까지 네 명이 근무했었다. 나는 학교로, 한 명은 교육상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직되고, 실장은 지방으로 쫓겨 갔다가 복직되었다.
나머지 한 명은 사회과학원으로 배치되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로 서기실은 하나의 부서가 되어 적지 않은 인원이 근무하게 되었다. 1970년 10월 초순, 나는 사상개조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은 성과와 교훈에 대해 보고하고 싶다는 이유를 달아 김일성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10월 20일 아침 집무실에서 나를 만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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