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68회]
  • 관리자
  • 2010-06-04 10: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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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들려왔다. 얼마 뒤에 그 소문은 김일성의 귀에돋 들어갔다. 김일성은 당장 장성택의 가족관계를 조사토록 지시했다. 조사결과 장성택의 아버지 쪽의 경력에 문제가 있다는 자료가 나왔다. 김일성은 자기계열과는 다른 활동가들을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내면서 딸에게 당장 관계를 끊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동생 김영주에게 어떻게든 두 사람의 관계를 끊어놓으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김영주는 나를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는 둘이 만나지 못하게 통제해달라고 했다. 나는 연애를 하는 남녀를 장제로 떼놓으면 더 만나려고 하는 걸 보아왔기 때문에 김영주의 지시는 그저 적당히 집행하는 척했다. 어쩌다 장성택을 붙잡고 있으라는 지시가 내려지면 할 수 없이 그의 누이 집으로 갔지만, 장성택이 안 들어왔다고 하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김경희는 총장실로 나를 찾아와, 총장선생이 왜 사랑문제에 간섭하느냐고 항의했다. 나는 그녀가 그저 어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일로 매우 당차고 똑똑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삼촌인 김영주를 만나 김경희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김영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김경희가 너무 성격이 독해서 오빠인 김정일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는커녕 은밀히 자주 만난다는 걸 알게 된 김일성은 김영주에게 장성택을 김대에서 출학시켜 원산에 있는 경제대학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김영주의 지시를 받은 나는 더 이상 장성택을 보호할 수 없었다. 나는 장성택에게 아끼던 책을 주면서 공부 잘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그들이 언젠가는 다시 만나 결합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내 생각대로 훗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집과 장성택 부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장성택은 내 아들 경모를 자기 집으로 자주 데려갔으며, 내가 제5차 당대회 토론을 준비하고 있을 때는 사무실로 야참을 가져와 같이 밤을 새우면서 내 원고를 정서해준 적도 있었다.

장성택의 삼형제는 모두 유능하고 똑똑했다. 그의 맏형은 군단장으로, 둘째형은 군단 정치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는데, 김일성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소련의 ‘우경 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 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자주적인 혁명노선을 견지한다면서 주체를 더욱 강조했다.

그리하여 1966년 당 대표자회의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그릇된 노선을 반대하는 노동당의 주체적 노선을 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발언을 했으며,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뽑혔다. 하지만 나의 이런 성공을 질투하듯이 큰 사건이 터져, 난생 처음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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