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62회]
- 관리자
- 2010-06-04 10:50:47
- 조회수 : 1,561
다음날 나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회의가 결렬될 경우 북한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성명서를 작성하기 위해 김일 단장과 함께 숙소에 남았다. 하루 종일 끙끙대다가 겨우 초안을 작성했다. 저녁 무렵에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중소간 화해가 성립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측 국제부장이 돌아와 들려준 말에 의하면, 회의가 막 결렬되려던 찰나에 중국의 덩샤오핑, 평전과 소련의 꼬즐로프, 쑤슬로프가 최종적으로 만나 담판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소련측이 중국측에 “중국은 우리를 계속 수정주의로 몰아붙이겠는가?”하고 말하자, 중국측이 그에 지지 않고 받아쳤다고 한다. “소련은 우리를 계속 국제종파라고 비방하겠는가?” “아니다. 소련은 이제 중국을 비방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중국도 소련을 수정주의로 몰아붙이지 않겠다.” “그럼 우리 양측이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맹세하자.” "좋다!” 그리하여 소련과 중국의 대표들은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서로 비방하지 않기로 맹세했다는 것이었다.
국제부장은,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조항을 철회하도록 소련공산당에 요구하기로 한 북한·중국 양국간 약속을 중국대표단이 저버린 채 일방적으로 소련과 화해해버렸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다음날 아침 흐루시초프가 1시간 동안 연설을 했는데, 연설내용은 전날과 180도 달랐다. 저녁에도 흐루시초프가 연회를 차렸는데, 알바니아 대표단을 비롯한 몇몇 나라 대표단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갔다. 흐루시초프는 점잖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걸 자랑하면서 농담과 쌍소리를 해대며 사람들을 웃기거나 놀라게 했다. 중소논쟁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이다. 11월 7일, 10월 혁명기념일에 군중시위를 보기 위해 각국 대표단이 레닌 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덩샤오핑이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를 절며 뒤처졌다. 그러자 앞서 가던 흐루시초프가 덩샤오핑을 돌아다보면서 먼저 가라고 권했는데, 덩샤오핑은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 앞을 걸어갈 수 있겠느냐면서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다시 권하면서 말했다.
“괜찮으니 앞서 가시오. 나는 당신을 뒤에서 두고서는 안심이 안 되어 도저히 가지 못하겠소. 회의에서 나를 몰아붙였는데 오늘은 뒤에 오다가 그 지팡이로 후려칠 것 같아서요.” 이에 같이 가던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는 것이었다. 중·소간에 화의가 성립되고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겉과는 달리 두 나라는 여전히 소리 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중소간의 논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사적으로는 물질적 욕망이나 권력욕이 없고 오직 공산주의 이념만을 위하여 싸우는 참다운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중국과 소련이 서로 편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권력욕이 강하며 권력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론의 정당성에 관계없이 그것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하여 해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자들도 이론 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면서 오로지 권모술수에만 능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나는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자체에는 명백한 과학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마르크스나 레닌의 학설을 교조주의적으로 대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하여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소련측이 중국측에 “중국은 우리를 계속 수정주의로 몰아붙이겠는가?”하고 말하자, 중국측이 그에 지지 않고 받아쳤다고 한다. “소련은 우리를 계속 국제종파라고 비방하겠는가?” “아니다. 소련은 이제 중국을 비방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중국도 소련을 수정주의로 몰아붙이지 않겠다.” “그럼 우리 양측이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맹세하자.” "좋다!” 그리하여 소련과 중국의 대표들은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서로 비방하지 않기로 맹세했다는 것이었다.
국제부장은,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조항을 철회하도록 소련공산당에 요구하기로 한 북한·중국 양국간 약속을 중국대표단이 저버린 채 일방적으로 소련과 화해해버렸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다음날 아침 흐루시초프가 1시간 동안 연설을 했는데, 연설내용은 전날과 180도 달랐다. 저녁에도 흐루시초프가 연회를 차렸는데, 알바니아 대표단을 비롯한 몇몇 나라 대표단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갔다. 흐루시초프는 점잖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걸 자랑하면서 농담과 쌍소리를 해대며 사람들을 웃기거나 놀라게 했다. 중소논쟁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이다. 11월 7일, 10월 혁명기념일에 군중시위를 보기 위해 각국 대표단이 레닌 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덩샤오핑이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를 절며 뒤처졌다. 그러자 앞서 가던 흐루시초프가 덩샤오핑을 돌아다보면서 먼저 가라고 권했는데, 덩샤오핑은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 앞을 걸어갈 수 있겠느냐면서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다시 권하면서 말했다.
“괜찮으니 앞서 가시오. 나는 당신을 뒤에서 두고서는 안심이 안 되어 도저히 가지 못하겠소. 회의에서 나를 몰아붙였는데 오늘은 뒤에 오다가 그 지팡이로 후려칠 것 같아서요.” 이에 같이 가던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는 것이었다. 중·소간에 화의가 성립되고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겉과는 달리 두 나라는 여전히 소리 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중소간의 논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사적으로는 물질적 욕망이나 권력욕이 없고 오직 공산주의 이념만을 위하여 싸우는 참다운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중국과 소련이 서로 편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권력욕이 강하며 권력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론의 정당성에 관계없이 그것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하여 해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자들도 이론 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면서 오로지 권모술수에만 능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나는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자체에는 명백한 과학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마르크스나 레닌의 학설을 교조주의적으로 대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하여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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