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61회]
- 관리자
- 2010-06-04 10:50:27
- 조회수 : 1,655
나는 최용건의 연설문을 방문기간 내내 작성해줬는데, 최용건은 매우 흡족해했다. 그는 때때로 나를 불러 의견을 묻곤 했다. 최용건은 중앙당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로 소문나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귀국한 뒤 김일성은, 최용건의 연설문을 모두 읽어보았는데 매우 훌륭했다고 하면서 나를 칭찬해주었다.
날이 갈수록 중소간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김일성은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우리도 주체를 더욱 튼튼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흐루시초프는 마오쩌둥의 도전에 맞서 국제공산주의운동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해보려는 속셈으로 중국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소부르주아적 조급성의 표현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방귀를 뀌려다가 똥을 쌌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하여 대약진의 실패로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해보려는 심산인 듯 사상이론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두 대국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선전했으며, 경제· 문화건설에도 자주적인 노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전히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0년 10월 모스크바에서 81개국 공산당·노동당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크레믈린 궁전 안의, 일찍이 레닌이 집무를 보던 방에서 진행되었으며, 양편으로 갈라진 논쟁이 만 1개월간이나 계속되었다. 북한노동당에서는 단장인 김일과 사상비서인 김창만이 참석했고, 나는 이론고문으로 동행했다. 북한과 베트남, 알바니아는 중국을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소련편을 들고 있었다.
중국은 류사오치가 대장이었고, 덩샤오핑과 펑전이 선봉장이었다.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대장이었고 조직비서인 꼬즐로프, 선전비서인 쑤슬로프가 선봉장으로 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련공산당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기수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군소정당들은 무조건 소련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래서 중국측으로서는 아무리 좋은 발언을 해도 7대1의 비율로 공격을 받다 보니 발언내용에 힘이 빠지고 늘 소련공산당의 주장만이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었다.
브라질을 비롯한 일부 군소정당 대표들은 공산주의운동의 분열을 우려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목이 메도록 개탄했다. “10월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한 소련공산당과 2만5천 리 대장정을 하여 중국혁명을 수행한 중국공산당이 싸운다는 것은 말이나 되는가? 이 방이 바로 레닌이 일하던 방이다. 서로 싸우는 우리를 레닌이 살아 있다면 무엇이라 평가하겠는가?” 호치민이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좋다고 했으나 류사오치가 거부함으로써 회의는 싱겁게 결렬되고 말았다. 김일은 국제전화로 김일성에게 회의결과를 보고하자 김일성은 이렇게 지시했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다시 들어가 감자를 캐먹으면서 유격투쟁을 할지언정 소련의 대국주의적 압력에는 절대로 굴하지 말라.” 김일성은 사회주의 나라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국제전화는 소련교환수들이 관리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오히려 자신의 말이 소련공산당측에 들어가도록 더욱 큰 목소리로 말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중소간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김일성은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우리도 주체를 더욱 튼튼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흐루시초프는 마오쩌둥의 도전에 맞서 국제공산주의운동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해보려는 속셈으로 중국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소부르주아적 조급성의 표현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방귀를 뀌려다가 똥을 쌌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하여 대약진의 실패로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해보려는 심산인 듯 사상이론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두 대국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선전했으며, 경제· 문화건설에도 자주적인 노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전히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0년 10월 모스크바에서 81개국 공산당·노동당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크레믈린 궁전 안의, 일찍이 레닌이 집무를 보던 방에서 진행되었으며, 양편으로 갈라진 논쟁이 만 1개월간이나 계속되었다. 북한노동당에서는 단장인 김일과 사상비서인 김창만이 참석했고, 나는 이론고문으로 동행했다. 북한과 베트남, 알바니아는 중국을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소련편을 들고 있었다.
중국은 류사오치가 대장이었고, 덩샤오핑과 펑전이 선봉장이었다.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대장이었고 조직비서인 꼬즐로프, 선전비서인 쑤슬로프가 선봉장으로 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련공산당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기수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군소정당들은 무조건 소련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래서 중국측으로서는 아무리 좋은 발언을 해도 7대1의 비율로 공격을 받다 보니 발언내용에 힘이 빠지고 늘 소련공산당의 주장만이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었다.
브라질을 비롯한 일부 군소정당 대표들은 공산주의운동의 분열을 우려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목이 메도록 개탄했다. “10월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한 소련공산당과 2만5천 리 대장정을 하여 중국혁명을 수행한 중국공산당이 싸운다는 것은 말이나 되는가? 이 방이 바로 레닌이 일하던 방이다. 서로 싸우는 우리를 레닌이 살아 있다면 무엇이라 평가하겠는가?” 호치민이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좋다고 했으나 류사오치가 거부함으로써 회의는 싱겁게 결렬되고 말았다. 김일은 국제전화로 김일성에게 회의결과를 보고하자 김일성은 이렇게 지시했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다시 들어가 감자를 캐먹으면서 유격투쟁을 할지언정 소련의 대국주의적 압력에는 절대로 굴하지 말라.” 김일성은 사회주의 나라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국제전화는 소련교환수들이 관리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오히려 자신의 말이 소련공산당측에 들어가도록 더욱 큰 목소리로 말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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