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44회]
- 관리자
- 2010-06-04 10:43:53
- 조회수 : 1,582
1952년 5월, 나는 한 여자와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녀가 바로 50년 가까이 나와 고락을 함께한 아내 박승옥이다. 그녀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에 간호병으로 참가했다가 제대하여 모스크바 제1의과대학에 수학하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나는 학생위원장이었고 그녀는 의과대학 반장이었다.
그녀가 내게 의과대학 조선인 학생들의 실태를 보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둘 사이는 자연히 친해졌다. 나는 그녀를 처음부터 진정으로 대했으며, 그녀 역시 나와(이미 헤어진)미모의 그 여자 간에 얽힌 소문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유학생들은 박승옥과 나의 만남을 모두 반겼고 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솔직했으며 실천력이 강한 여자였다.
소련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를 위하는 것이 하나의 도덕률이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련 풍습을 따라 여자가 남자와 친해지면 그 남자가 마치 자신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위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박승옥은 극장이든 상점이든 어디를 가든지 앞장서서 일을 처리했다. 또 러시아 사람들과 교섭도 잘하고 흥정도 잘하는, 매사에 능력이 출중한 여자였다.
그녀는 정치적 지위보다 학문적 권위와 사람됨을 더 귀중히 여겼다. 자기 아버지가 생모와 이혼한 데 대해 늘 불만이었고, 어머니를 몹시 동정했다. 나를 만날 즈음 그녀에게는 뒤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대사관에 근무하는 서기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를 멀리하고 나를 만났다. 그녀는 일생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나에게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충실한 아내이자 동지를 버리고 온 내가 어떻게 천벌을 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목이 멜 때가 많다. 1952년 여름, 나는 북한 무력부에서 온 대좌(대령)의 통역으로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사회주의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고 핀란드 공산당과 사회당 사람들에게 조선전쟁의 실태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때 비행기를 처음 타보았으며, 자본주의 나라인 핀란드가 의외로 생활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핀란드에서 돌아온 뒤로 박승옥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박승옥은 나의 진심을 알게 되자 자기의 운명을 내게 온전히 맡겨왔다. 나는 그 무렵 자만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학습에서 어느 정도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학생위원장으로서 유학생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면서, 평양을 떠날 때 가졌던 비장한 결심도 느슨해져 있었다. 게다가 대체로 성관계가 자유로운 곳이어서 나와 박승옥은 깊은 관계를 맺고 말았다. 우리 둘의 관계가 유학생들 사이에 알려지자 아내는 공부를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결혼하여 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사관의 당 비서는 마침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떠날 때 대학 당 위원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만큼, 우리 둘의 처지를 알고는 도와주려 했다. 그는 우리 둘을 불러놓고는, 나는 1년 후면 귀국해야 하고 박승옥은 아직도 4~5년을 더 공부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가 내게 의과대학 조선인 학생들의 실태를 보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둘 사이는 자연히 친해졌다. 나는 그녀를 처음부터 진정으로 대했으며, 그녀 역시 나와(이미 헤어진)미모의 그 여자 간에 얽힌 소문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유학생들은 박승옥과 나의 만남을 모두 반겼고 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솔직했으며 실천력이 강한 여자였다.
소련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를 위하는 것이 하나의 도덕률이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련 풍습을 따라 여자가 남자와 친해지면 그 남자가 마치 자신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위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박승옥은 극장이든 상점이든 어디를 가든지 앞장서서 일을 처리했다. 또 러시아 사람들과 교섭도 잘하고 흥정도 잘하는, 매사에 능력이 출중한 여자였다.
그녀는 정치적 지위보다 학문적 권위와 사람됨을 더 귀중히 여겼다. 자기 아버지가 생모와 이혼한 데 대해 늘 불만이었고, 어머니를 몹시 동정했다. 나를 만날 즈음 그녀에게는 뒤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대사관에 근무하는 서기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를 멀리하고 나를 만났다. 그녀는 일생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나에게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충실한 아내이자 동지를 버리고 온 내가 어떻게 천벌을 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목이 멜 때가 많다. 1952년 여름, 나는 북한 무력부에서 온 대좌(대령)의 통역으로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사회주의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고 핀란드 공산당과 사회당 사람들에게 조선전쟁의 실태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때 비행기를 처음 타보았으며, 자본주의 나라인 핀란드가 의외로 생활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핀란드에서 돌아온 뒤로 박승옥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박승옥은 나의 진심을 알게 되자 자기의 운명을 내게 온전히 맡겨왔다. 나는 그 무렵 자만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학습에서 어느 정도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학생위원장으로서 유학생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면서, 평양을 떠날 때 가졌던 비장한 결심도 느슨해져 있었다. 게다가 대체로 성관계가 자유로운 곳이어서 나와 박승옥은 깊은 관계를 맺고 말았다. 우리 둘의 관계가 유학생들 사이에 알려지자 아내는 공부를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결혼하여 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사관의 당 비서는 마침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떠날 때 대학 당 위원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만큼, 우리 둘의 처지를 알고는 도와주려 했다. 그는 우리 둘을 불러놓고는, 나는 1년 후면 귀국해야 하고 박승옥은 아직도 4~5년을 더 공부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