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2회]
  • 관리자
  • 2010-06-04 10: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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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소련병사들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여자를 소개해 달라, 돈을 달라고 하면서 이유 없기 괴롭히고 폭행까지 하는 사례가 많았다. 나도 밤중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련병사들에게 붙들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겨우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빠져 나왔는데, 실은 그럴 때도 나를 먼 발치에서 호위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축구부와 권투부원들이었는데, 나를 따르다가 급할 때는 구원하기 위해 팀을 짰다는 걸 알고는 나는 기쁨보다 코끝이 찡한 감동을 받았다. 이런저런 사고를 쳤던 소련병사들은 나중에 들으니 주로 죄수부대였다고 했다. 그들은 도적질이나 강간 등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기고 했다. 또 어떤 집에 여덟 명이 떼지어 들어가 여학교 3년생을 윤간하여 몸을 망쳐놓은 사건까지 있었다.

고향집에서는 내가 고사가 된 뒤로 배급을 타게 되어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토지개혁이 되면 이현리에 있는 밭을 삼촌한테 넘기고, 동네에서는 두 사람 분의 땅을 분배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했다. 나는 교사이면서도 그야말로 적빈이었다. 번듯하니 입고 나설 만한 옷 한 벌이 없었고, 필기도구로 절실히 필요한 만년필도 없었다.

학생들 중에는 내가 가장 아끼던 세 학생이 있었는데 윤재용, 이면오, 박정호 군이 바로 그들이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윤재용을 가장 아꼈다. 윤 군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순사를 했었는데, 해방이 되고부터는 폐가 약해져서 증산군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또 그의 고모집이 평양에 있어 때때로 그 고모가 학교로 음식을 해다 주었다. 통강냉이를 주로 먹던 우리는 윤 군의 고모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곤 했다.

윤 군의 마음씀씀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게 입을 만한 옷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자기 아버지가 입던 순사복을 견장만 떼고 가져온 적도 있었다. 만년필은 사업학교 선배인 김덕원 씨가 선물로 주어 고맙게 쓰게 되었다.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다. 기숙사 옆의 창고에는 말이 끄는 달구지가 두 대나 있었고, 그 밖에도 쓸 만한 도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누가 가져간지도 모르게 모두 도둑맞고 말았다. 학교 옆에는 일본인 수용소가 있었다. 어떤 때는 소련병사들이 그곳으로 찾아가 여자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곤 했는데, 장소를 잘못 짚어 우리 학교 기숙사를 찾아올 때도 있었다. 소련병사들은 이쪽과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다 술에 취해 사람을 때리거나 총을 여기저기 난사하기도 해서 위험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기숙사 문을 걸고 잠자리에 들려던 시간에 소련병사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혹시라도 불빛을 보고 찾아와 행패를 부릴까봐 불을 끄고 자는 척했다. 소련병사들은 큰 소리로 욕을 해대면서 계속 문을 두드렸다. 겁이 난 우리는 석탄창고에 숨었다. 방학 때여서 다른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윤재용, 이면오, 박정호 등 넷뿐이었다.

우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우리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참을 두드리던 소련병사들이 모두 돌아갔는지 그만 조용했다. 우리는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이며 방으로 돌아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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