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1회]
  • 관리자
  • 2010-06-04 10: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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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나가 모교인 평양상업학교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잘 왔다. 지금 일본인 교사들이 다 가버려서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어. 장엽이 자네가 학교 일을 좀 도와줘야겠어.” 그러면서 8월 23일부터 서울- 평양간 기찻길이 끊겼다는 것이었다.  아, 그때 내가 서울로 왔더라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게는 38선을 불법적으로 넘을 만한 용기가 없었고, 또 서울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늙은 부모님을 두고 혼자 서울로 가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그런 생각은 아예 품지도 않았다. 평양에서는 갑자기 좌익분자들이 대거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나에게 공산당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설득시키려는 자들도 많았다.

나는 부화뇌동하기보다는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정세를 관망하기로 마음먹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평양상업학교는 만수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뒤에 도청 청사가 있었다. 도청 청사는 평양에서 으뜸가는 건물이었다. 그래서 소련군은 도청 청사를 자기네 사령부로 정하고 북조선 당국에는 시청 청사를 배당했다. 또 공산당 본부는 세무서 청사를 쓰도록 했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일본인 카와카미 하지메가 쓴 『가난이야기』와, 『공산당선언』이나 『반뒤링론』등을 읽었다. 그러나 이해가 더디었다. 그렇다고 반박할 능력도 물론 없었다. 선생들이 부족하여 여러 과목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난ㄴ 무척 바빴다. 우선 내가 주산선수였다는 것이 인연이 되어 주사도 가르치고, 또 사회과학이라는 과목(공산주의 이론의 초보)과 때로는 대수나 기하도 가르쳤다.

학교에는 새로 많은 학생들이 들어왔는데, 공부는 못하지만 축구나 농구선수라고 하여 받아들인 학생도 있어 구성이 복잡했다. 그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 소련군 지프차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더니 장교들이 교장실로 들이닥쳤다. 학교를 소련군사령부에 내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는 평양역 부근에 있는 일본인 여학교 자리로 가야 한다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는 돌아갔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이사를 시작하자 소련군 장교가 간섭을 하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팔던 학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나 필요한 학용품이라며 말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소련군대에게는 학용품도 탐나는 전리품인가 하고 생각하며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여학교는 위치로는 평양상업학교만 못해도 건물의 상태는 더 나았다. 더구나 책이 많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학교 건물이 넓다 보니 상업학교와 함께 최고재판소와 판사양성소도 들어왔다. 기숙사도 있어서 나는 기숙사 사감을 맡게 되었다.

학교에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은 선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유독 나를 따랐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의 선배인 까닭보다도 그들을 가식 없이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첫 직장이며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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