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6회]
- 관리자
- 2010-06-04 10:36:06
- 조회수 : 1,673
학교에서는 시국강연회가 있으면 꼭 참석하여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부지런히 들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패망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일본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학도지원병 문제를 전면으로 부각시켰다. 조선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긴장하여 골머리를 앓았지만, 나는 건성으로 듣고 흘려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야마구치 고등상업학교에 다니던 평양상업학교 동창생인 송한혁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평양상업학교 5년 재학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그래서 개교 이래 최고기록을 세웠다는 소문이 자자한 친구였다. “어쩐 일이냐?” “학도지원병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모르다니, 뭘 모른단 말이냐?”
“아버님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경찰서에서 하도 괴롭혀서 내가 학도병으로 나가는 걸 찬성하셨다는 거야.” “안 돼. 일본놈들은 머지않아 망해. 그런데도 군대에 가다니,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군대에 가서 연합군 쪽으로 탈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 너, 개미굴에 빠진 개미가 다시 나오는 걸 본 적 있어? 연합군쪽으로 도망갈 용기가 있다면 일본이 망할 때까지 감옥에서 기다릴 용기는 왜 없는 거야? 넌, 다 좋은데 마음이 너무 여려서 탈이야.” 송한혁은 내 말을 듣고는 그게 좋겠다고 찬성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결국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고 말았다.
내 생각에 그는 나보다 열 곱은 재간이 앞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생각하는 게 지방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나 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에는 학도병에 대한 얘기는 한 줄도 없었다. 하기야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해도 평소의 예로 보아 아버지는 결코 일본경찰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4년 1월 말, 하루는 형사가 하숙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내게 조선으로의 송환을 통보하고는 내일 짐을 싸놓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올 것이 놨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심하게 항의하지는 않았다. 형사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져봐야 소용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짐을 싸면서 일본의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서에는 100여 명의 조선인이 모여 있었다. 경찰은 우리를 기차 편으로 시모노세키로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겨우 서 있을 정도로 작은 방에 몰아넣어졌다. 밤이 되자 경찰은 우리에게 서서 자라고 했다.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좁고 추운 방에서 떨어야 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이 기억에 생생한데, 외투를 입지 않을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가장 어렸다. 참다못해 어떤 사람이 불평을 제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악의에 찬 고함소리였다. “군대에도 나가지 않은 비국민이 무슨 불평이야, 유치장에 들어가고 싶어?” “군대에 안 갔다고 서서 재우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유치장에 갈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우리 쪽에서도 화가 난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두시오. 방을 다시 배정하겠소.” 토오쿄오에서 따라온 경시청 직원이 그런 실랑이를 뜯어 말렸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우리더러 다다미를 깐 넓은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 방은 경찰서의 무도장이었는데, 유리가 깨진 창문이 적지 않아 한데나 다름없이 추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야마구치 고등상업학교에 다니던 평양상업학교 동창생인 송한혁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평양상업학교 5년 재학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그래서 개교 이래 최고기록을 세웠다는 소문이 자자한 친구였다. “어쩐 일이냐?” “학도지원병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모르다니, 뭘 모른단 말이냐?”
“아버님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경찰서에서 하도 괴롭혀서 내가 학도병으로 나가는 걸 찬성하셨다는 거야.” “안 돼. 일본놈들은 머지않아 망해. 그런데도 군대에 가다니,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군대에 가서 연합군 쪽으로 탈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 너, 개미굴에 빠진 개미가 다시 나오는 걸 본 적 있어? 연합군쪽으로 도망갈 용기가 있다면 일본이 망할 때까지 감옥에서 기다릴 용기는 왜 없는 거야? 넌, 다 좋은데 마음이 너무 여려서 탈이야.” 송한혁은 내 말을 듣고는 그게 좋겠다고 찬성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결국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고 말았다.
내 생각에 그는 나보다 열 곱은 재간이 앞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생각하는 게 지방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나 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에는 학도병에 대한 얘기는 한 줄도 없었다. 하기야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해도 평소의 예로 보아 아버지는 결코 일본경찰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4년 1월 말, 하루는 형사가 하숙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내게 조선으로의 송환을 통보하고는 내일 짐을 싸놓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올 것이 놨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심하게 항의하지는 않았다. 형사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져봐야 소용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짐을 싸면서 일본의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서에는 100여 명의 조선인이 모여 있었다. 경찰은 우리를 기차 편으로 시모노세키로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겨우 서 있을 정도로 작은 방에 몰아넣어졌다. 밤이 되자 경찰은 우리에게 서서 자라고 했다.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좁고 추운 방에서 떨어야 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이 기억에 생생한데, 외투를 입지 않을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가장 어렸다. 참다못해 어떤 사람이 불평을 제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악의에 찬 고함소리였다. “군대에도 나가지 않은 비국민이 무슨 불평이야, 유치장에 들어가고 싶어?” “군대에 안 갔다고 서서 재우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유치장에 갈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우리 쪽에서도 화가 난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두시오. 방을 다시 배정하겠소.” 토오쿄오에서 따라온 경시청 직원이 그런 실랑이를 뜯어 말렸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우리더러 다다미를 깐 넓은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 방은 경찰서의 무도장이었는데, 유리가 깨진 창문이 적지 않아 한데나 다름없이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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