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5회]
  • 관리자
  • 2010-06-04 10: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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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오쿄오에 있을 때 나는 하루에 한 끼 정도를 먹었다. 젊어서 그런지, 습관이 되어 그런지 별로 힘들지 않았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었다. 잠도 편안히 누워서 자지 않고 앉아서 잤다. 이불은 굵은 무명을 염색한 것이었다. 겨울에도 그것만 두르고 앉아 있으면 어디서고 잠자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단식도 자주 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단식을 하고 잠을 덜 자면 욕망이 없어지고 마음이 안정되어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단식 중에 맥이 빠져 의지가 약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 하나 극복할 정신력이 없다면 죽어버리자 하고 마음을 독하게 다잡으면 몸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힘이 생겼다.

나는 이틀에 한 끼만 먹으면서 두 달 동안 정상적으로 생활한 적도 있고, 생쌀을 한 줌씩 먹으면서 여섯 달 동안 생활하기도 했다. 나는 유달리 체면을 차리는 데 신경을 썼는데, 노동판에 나가 일하면서 그 버릇도 고쳐졌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판에 가면 노동자들은 십장을 상전 모시듯이 하지만 십장은 노동자들을 문자 그대로 자기 부하처럼 취급했다.

노동자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욕설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넘겼다. 철도역에서 수화물을 다루다 보면 상자에서 귤이나 사과를 꺼내 먹는 경우도 있었다. 십장은 누가 훔쳐 먹었는지 따지지도 않고 예외 없이 따귀를 한 대씩 후려갈겼다. 하지만 그 매는 지은 죄를 실토하라는 고문성이 아니라 말하자면 면죄부 용이었다.

따귀를 한 대씩 때린 걸로 그만 더 이상 과일 먹은 걸 문제 삼지 않고 자신이 해결하고는 했다. 그리고는 따귀를 맞은 사람이나 때린 사람이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이처럼 품팔이 판에는 부끄러운 것이 없고 크게 숨길 것도 없었다. 그들의 생활은 참으로 단순했다. 그 속에서는 조선인, 일본인을 따지지도 않았다.

십장이나 일을 하는 사람이나 남들과 함께 일하다가 하루 품값을 타면 그만이었고 다음에 만나면 만난 대로 또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물건을 아끼는 습관도 몸에 배었다. 나는 자주 일하러 나가는 것이 싫어서 외투든 시계든 무엇이나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내다팔아서 썼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신문을 꼭 봤다.

신문을 다 보고는 버리기 아까워 적당히 접어서 노트로 쓰기도 했다. 신문지위에 글을 쓰자면 신문활자보다 크게 써야 했는데, 그러자니 잉크가 푹푹 줄어드는 게 아까워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나는 철저하게 절제했다. 빨래나 청소, 바느질은 물론이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이 습관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대학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었다. 서양 철학사를 안내서로 삼아 독일고전철학을 공부했는데, 그 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훗날 철학연구원으로서 모스크바에 갔을 때, 나는 젊은 날의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는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독일고전철학에 대해서만은 모스크바 종합대학 졸업생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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