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3회]
  • 관리자
  • 2010-06-04 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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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눈뜨다.
나는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으면서 그때까지 몇 년 동안 주산 연습만 한 것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러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더 하고픈, 지식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다. 내 고민을 알았던지 한번은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기왕에 학문을 하려거든 에서 가장 힘든 학문을 찾아서 한번 해봐라. 넌 할 수 있을 거야.”

고학을 해서라도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던 터라, 형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도 고마웠다. 나는 이공계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무엇보다도 색맹이라서 포기해야 했다. 수학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상업학교에서 배운 수학으로는 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역시 포기해야 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학급성적의 10분1, 즉 50명 중 5등 권내에 들어야 상급학교 진학추천을 해준다는 총독부 규정이 발표되었다. 나는 졸업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 진학할 길을 열심히 찾았다. 그 결과 고학을 전제로 한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머지않아 ㅇ리본이 망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또 일본의 패망은 조선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큰 변화에 대처하려면 법을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는 법학을 최종 선택하기로 했다. 그동안 관심과 애정으로 나를 보살펴주던 교무주임 선생한테도 상의해봤는데, 그 역시 상업이나 경제 분야에 진출할 생각이 없다면 법학을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당시 사립대학에는 상과, 경제과, 법과가 있었다. 훗날 그때 경제과를 선택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상업학교 졸업식은 1942년 3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 해의 졸업식은 1941년 12월로 앞당겨졌다. 나는 졸업을 하고 그 해 12월 27일,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불안감을 안고 토오쿄오로 향했다.

늙은 부모를 두고 망해가는 일본으로 떠나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더 배우려면 가야 했다. 낯선 이국 땅 토오쿄오에 도착한 나는 선배들을 찾아가 학과지망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내 의견을 지지해 주었다. 그들은 일본에는 노동력이 부족하여 고학을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위로했다.

츄우오오대학 야간 전문 부 법과를 최종 선택한 나는 시험을 쳤다. 나를 상업학교 출신이라고 깔보던 소학교 동창생들은 다 낙방하고 나 혼자만 대학에 합격했다. 입학을 한 뒤 한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형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정신병이 걸렸는데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 집에서 치료하다가 그만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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