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2회]
- 관리자
- 2010-06-04 10:47:05
- 조회수 : 1,604
평양경제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심재윤 선생은 숙청 회오리가 한창일 때 김일성대학에서 통신학부를 맡고 있었다. 그는 연안파의 최창익이 체포되자 최창익을 나쁜 놈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에서는 그가 연안에서 활동한 종파분자이고 또 연안에 가기 전에는 일본에서 ‘일월회’라는 종파단체에 소속되었다는 것과, 그의 동료들이 대부분 종파분자라는 점을 들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를 맹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은 나에게도 그와 관계를 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인정에 이끌려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나는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추락이 임박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내 힘으로는 도울 수가 없었다. 그는 평안북도로 쫓겨갔는데, 그 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때 그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아마도 쉰이 넘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내 친구인 송한혁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이는 50년대 중반의 권력다툼으로 희생된 한 인텔리의 얘기도 되기 때문이다. 대학과 함께 백송리에서 평양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송한혁이 제대해 집으로 가기도 전에 배낭을 멘 채 찾아왔다.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김대 연구원에서 1개월 정도 있다가 다시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갔었다. 그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후퇴하다가 숙천군에서 국군 낙하산병들에게 잡혀 탄약을 날라주게 되었다. 후퇴했던 인민군대가 중국지원군과 함께 다시 진격해올 때 인민군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복당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역에 대한 부담으로 그는 7년간 인민군에서 복무한 다음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디로 배치되었어?”
“평양시 서구역 인민위원회 상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어.” 그와 같은 수재가 구역의 상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교육성에 찾아가 송한혁의 배치를 재고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상업대학교 학장을 찾아가 송의 뛰어난 재능을 설명하면서 그를 상업대학교 교원으로 채용해주도록 간청하자, 학장은 못 이기는 체하며 들어주었다.
상업대학교에 배치된 송한혁은 한동안 말썽 없이 근무했다. 그런데 1956년 8월, 앞에서 설명한 전원회의 이후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숙청당하자, 당은 독재를 더욱 강화하면서 지식인의출신성분을 다시 엄격히 따지게 되었다. 송은 그리 부유한 집안 태생은 아니었으나 일본군에 학도지원병으로 나갔다는 것과, 형이 월남하여 남한에 있다는 것 등이 문제가 되어 결국 평안북도 피현군에 있는 상업일꾼 양성소 교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가 농촌으로 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중앙당에 들어가 있었지만 지방에 가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까운 인재 하나가 정치놀음에 희생된 것이었다. 송한혁에게서 나는 사람이 재능만 있고 선량하다고 하여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배웠다. 그것은 창조성보다도 자주성이 강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이었다.
토오쿄오애서 그를 만났을 때, 나는 학도지원병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학도지원병으로 나갔으며, 김일성대학 연구원으로 있을 때도 돌아가지 말아야 할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갔다. 또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말렸으나 아버지가 원한다면서 기어코 결혼을 했다. 송은 천성이 너무도 착하여 학창시절부터 선생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상업학교 시절 일본인 선생이 신궁참배를 하고 오라면 개별적으로 하고 온 것만 봐도 그랬다. 나는 그를 보면서 후대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것은 지식교육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불굴의 투지와 자주정신을 길러주어 스스로 자기 목표를 관철해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은 나에게도 그와 관계를 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인정에 이끌려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나는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추락이 임박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내 힘으로는 도울 수가 없었다. 그는 평안북도로 쫓겨갔는데, 그 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때 그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아마도 쉰이 넘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내 친구인 송한혁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이는 50년대 중반의 권력다툼으로 희생된 한 인텔리의 얘기도 되기 때문이다. 대학과 함께 백송리에서 평양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송한혁이 제대해 집으로 가기도 전에 배낭을 멘 채 찾아왔다.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김대 연구원에서 1개월 정도 있다가 다시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갔었다. 그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후퇴하다가 숙천군에서 국군 낙하산병들에게 잡혀 탄약을 날라주게 되었다. 후퇴했던 인민군대가 중국지원군과 함께 다시 진격해올 때 인민군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복당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역에 대한 부담으로 그는 7년간 인민군에서 복무한 다음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디로 배치되었어?”
“평양시 서구역 인민위원회 상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어.” 그와 같은 수재가 구역의 상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교육성에 찾아가 송한혁의 배치를 재고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상업대학교 학장을 찾아가 송의 뛰어난 재능을 설명하면서 그를 상업대학교 교원으로 채용해주도록 간청하자, 학장은 못 이기는 체하며 들어주었다.
상업대학교에 배치된 송한혁은 한동안 말썽 없이 근무했다. 그런데 1956년 8월, 앞에서 설명한 전원회의 이후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숙청당하자, 당은 독재를 더욱 강화하면서 지식인의출신성분을 다시 엄격히 따지게 되었다. 송은 그리 부유한 집안 태생은 아니었으나 일본군에 학도지원병으로 나갔다는 것과, 형이 월남하여 남한에 있다는 것 등이 문제가 되어 결국 평안북도 피현군에 있는 상업일꾼 양성소 교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가 농촌으로 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중앙당에 들어가 있었지만 지방에 가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까운 인재 하나가 정치놀음에 희생된 것이었다. 송한혁에게서 나는 사람이 재능만 있고 선량하다고 하여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배웠다. 그것은 창조성보다도 자주성이 강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이었다.
토오쿄오애서 그를 만났을 때, 나는 학도지원병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학도지원병으로 나갔으며, 김일성대학 연구원으로 있을 때도 돌아가지 말아야 할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갔다. 또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말렸으나 아버지가 원한다면서 기어코 결혼을 했다. 송은 천성이 너무도 착하여 학창시절부터 선생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상업학교 시절 일본인 선생이 신궁참배를 하고 오라면 개별적으로 하고 온 것만 봐도 그랬다. 나는 그를 보면서 후대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것은 지식교육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불굴의 투지와 자주정신을 길러주어 스스로 자기 목표를 관철해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