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0회]
- 관리자
- 2010-06-04 10:46:18
- 조회수 : 1,640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사회주의 나라들 중에서 북한의 개인숭배가 가장 심했다. 그 까닭은 북한에 봉건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었고, 또 권력을 잡은 김일성이 나이도 젊고 공산주의 투쟁 경력도 미미한데 있었다. 알려진 대로 김일성은, 아니 그의 본명인 김성주는 1940년 말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 극동방면군 보병 제88특별교도여단 제1교도영장이었고, 계급은 소련군 대위였다.
소련의 88특별교도여단에 소속된 조선인 가운데서 김일성이 선택된 것은 그가 젊은데다 전망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은 중국의 지도자들과는 상대가 안 되었다. 소련군 대위를 북조선의 전설적 영웅으로 치켜세우기 위해서는 과장된 선전이 필요했을 때인데, 당시 조선은 일제의 압제를 뼈아프게 겪은 상태여서 과대선전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국제공산당은 1919년 3월,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의 사회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세계 각국 공산당의 통일적인 국제조직이었다. 그러나 제3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린 이 국제공산당은 1943년에 해체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련공산당의 노선은 국제공산당의 노선과 같았다. 원래 국제공산당이 소련공산당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소련공산당이 국제공산당을 지도했다.
그러므로 소련에서 개인숭배를 비판했다는 것은 곧 북한에서도 개인숭배가 비판당할 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만든 것은 스탈린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 만세를 가장 많이 불렀고, 또 스탈린을 모방하여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분위기를 조장해왔다. 그래서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은 곧 김일성의 개인숭배 비판이었던 것이다.
소련당에서 파견한 소련 태생 조선인들이 소련당 노선을 북한에 관철시키려 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이해관계 차원이 아니라 개인독재를 찬성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사상적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독재를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 인텔리들이 모두 소련당 노선을 추종하여 김일성의 독재를 반대하고 나서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김일성은 가혹하고 잔인한 숙청을 통해 그 도화선에 불이 붙는 걸 막으려 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은 소련계 조선인이었고, 당 위원장(비서)은 중국 연안파 계열의 인물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당 위원장을 지도하는 평양시당 위원장도 연안파 계열이었다. 이렇게 되자 대학 안에서뿐만 아니라 중앙당에서도 나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때까지 나는 그 어느 파벌에도 가담한 일이 없고 경력도 단순한데다 김영주를 비롯한 많은 당내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또 총장이나 당 비서도 대학 당 부위원장인 나를 의식하며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때로 중앙당에서 나온 사람들은 나에게 대학의 실정을 물어보고는 총장이나 당 위원장에게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는 가기도 했다.
소련의 88특별교도여단에 소속된 조선인 가운데서 김일성이 선택된 것은 그가 젊은데다 전망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은 중국의 지도자들과는 상대가 안 되었다. 소련군 대위를 북조선의 전설적 영웅으로 치켜세우기 위해서는 과장된 선전이 필요했을 때인데, 당시 조선은 일제의 압제를 뼈아프게 겪은 상태여서 과대선전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국제공산당은 1919년 3월,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의 사회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세계 각국 공산당의 통일적인 국제조직이었다. 그러나 제3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린 이 국제공산당은 1943년에 해체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련공산당의 노선은 국제공산당의 노선과 같았다. 원래 국제공산당이 소련공산당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소련공산당이 국제공산당을 지도했다.
그러므로 소련에서 개인숭배를 비판했다는 것은 곧 북한에서도 개인숭배가 비판당할 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만든 것은 스탈린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 만세를 가장 많이 불렀고, 또 스탈린을 모방하여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분위기를 조장해왔다. 그래서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은 곧 김일성의 개인숭배 비판이었던 것이다.
소련당에서 파견한 소련 태생 조선인들이 소련당 노선을 북한에 관철시키려 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이해관계 차원이 아니라 개인독재를 찬성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사상적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독재를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 인텔리들이 모두 소련당 노선을 추종하여 김일성의 독재를 반대하고 나서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김일성은 가혹하고 잔인한 숙청을 통해 그 도화선에 불이 붙는 걸 막으려 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은 소련계 조선인이었고, 당 위원장(비서)은 중국 연안파 계열의 인물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당 위원장을 지도하는 평양시당 위원장도 연안파 계열이었다. 이렇게 되자 대학 안에서뿐만 아니라 중앙당에서도 나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때까지 나는 그 어느 파벌에도 가담한 일이 없고 경력도 단순한데다 김영주를 비롯한 많은 당내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또 총장이나 당 비서도 대학 당 부위원장인 나를 의식하며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때로 중앙당에서 나온 사람들은 나에게 대학의 실정을 물어보고는 총장이나 당 위원장에게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는 가기도 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