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46회]
  • 관리자
  • 2010-06-04 10:44:43
  • 조회수 : 1,574
나는 그 무렵,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는 인생관의 문제, 특히 인간의 삶의 목적과 행복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장차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보았으면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내가 청년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독일고전철학의 기본문제는 인식론이었다. 그래서 소련에 와서 처음에는 인식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에 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인식론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인식론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다. “인식론은 다 해명이 되었다. 그래서 더 연구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에 와서 인식론은 이미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생관에 관해서는 철학자들보다도 문학가들이 많이 다뤄왔다.

그래서 조선에 들어가면 책을 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소련에 있을 때 가능하면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유학의 마지막 시간을 문학서적을 읽는 데 온전히 바쳤다. 나는 아침에 레닌 도서관에 나가 세계문학의 대표적 고전들을 읽다가 밤이 깊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하여 4년에 걸친 나의 모스크바 유학생활은 끝났다.

모스크바 유학생활의 4년이 내 일생을 규정하는 귀중한 밑천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도, 지식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신념도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돌이켜볼수록 감개무량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의 나의 비극의 뿌리도 모스크바에서 싹튼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따먹지 말아야 할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달리, 나는 누구의 유혹도 없이 열매를 따먹었다고 생각한다.

1953년 11월, 나는 모스크바를 뒤로 한 채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평양은 예전의 그 도시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지상에는 집 한 채도 보이지 않고 토굴들만 즐비했다. 전쟁 동안 인민들이 겪었을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 편안히 살다온 것이 너무도 죄스러웠다.

귀국신고를 하자, 나는 김일성대학 철학강좌장으로 승진 배치되었다. 감격할 만큼 이례적인 당의 배려였다. 나는 아내와 9월에 태어난 첫딸 선이를 데리고 전쟁 중에 대학이 피난했다는 순천군 자모산 밑의 백송리를 찾아갔다. 당시에도 나는 전쟁을 북이 일으켰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대립, 그리고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간의 계급투쟁으로 전쟁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그저 빨리 북에 사회주의를 건설하여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실증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남한도 북의 사회주의를 따라와 저절로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내 정신이 그랬으므로 생활은 해방 전보다 더 어려웠으나 무엇인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주변에서는 좀도둑이나 유랑걸식하는 소년들과 소매치기하는 애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전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국토를 짓이겨 놓았다.

내가 살던 집만 해도 비가 오면 방이 질퍽하게 물이 샜으며, 누우면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벌레가 온몸을 기어다녔다. 쥐가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방안에 자욱히 고여 눈도 못 뜨고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