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76회]
- 관리자
- 2010-06-04 10: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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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김일성은 10월 20일 아침 집무실에서 나를 만나주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김일성에게 3년 동안 나의 사상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과,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를 깨달았으며,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확고히 파악했다고 말했다.
나는 김일성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상을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르크스주의가 객관적 법칙만 지나치게 강조할 뿐 주체인 인간의 역할을 응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주체사상을 철학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대단히 만족해하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총장은 이름만 걸어놓고 휴양소에 나가서 주체철학을 연구하는 사업을 해보시오. 그보다 나와 같이 지금 대학에 한번 나가봅시다.”
나는 김일성과 함께 대학 2호 교사를 둘러보면서 대학교육발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 달 후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내가 한 발언이 김일성의 관심을 끌었다. 김일성은 내 발언이 있고 나서 한 시간 가까이 나의 과오가 단순한 이론적 과오였다는 것과, 과오를 고치기 위해 성근하게 노력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등 나를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회의의 지도기관선거에서 나는 후보위원에서 정식위원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1971년 초부터 나는 두 명의 조수를 데리고 온천이 있는 황해남도 달천 휴양소로 갔다. 조수 한 명은 내가 일하던 서기실에서 과장으로 있다가 우리들이 쫓겨난 다음에 부실장으로 승진한, 소련유학을 다녀온 경제전문가였다. 다른 한 명은 선전부 이론선전과장으로 있는 양형섭의 처남인 김용원이었다. 그러니까 김일성의 고종사촌동생이었던 것이다.
과거에 나는 그와 그이 처의 지도교수였다. 내가 그를 데려간 것은 마음씨가 착하고 나를 잘 따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김일성 고종사촌들과의 마찰을 무마시키는 데는 내 사업에 그 집안에서 한 명을 동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일이 서툴러서 그 일에 능한 사람이 핑요하기도 했다.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세계관과 사회역사관, 인생관 문제를 새롭게 해명한 뒤로, 나는 예전의 의문을 품고 있던 부분들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르크스의 가장 어려운 저서도 펼쳐보았더니 이론의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가 명백히 이해되고 마르크스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 내가 데리고 나간 경제전문가 조수는 『자본론』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자랑하면서, 나의 새로운 철학적 원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입장이었다. 한번은 그에게 『자본론』을 다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웬걸요.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어려운 고전이라도 좋으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으면 가져오게. 문제에 따라 당장 해명해주지는 못할지 몰라도 하룻밤 만에 반드시 해명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있고난 뒤, 그는 몇 차례 질문할 것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때마다 해명해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나의 철학적 원리의 진리성을 인정했다.
나는 김일성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상을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르크스주의가 객관적 법칙만 지나치게 강조할 뿐 주체인 인간의 역할을 응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주체사상을 철학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대단히 만족해하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총장은 이름만 걸어놓고 휴양소에 나가서 주체철학을 연구하는 사업을 해보시오. 그보다 나와 같이 지금 대학에 한번 나가봅시다.”
나는 김일성과 함께 대학 2호 교사를 둘러보면서 대학교육발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 달 후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내가 한 발언이 김일성의 관심을 끌었다. 김일성은 내 발언이 있고 나서 한 시간 가까이 나의 과오가 단순한 이론적 과오였다는 것과, 과오를 고치기 위해 성근하게 노력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등 나를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회의의 지도기관선거에서 나는 후보위원에서 정식위원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1971년 초부터 나는 두 명의 조수를 데리고 온천이 있는 황해남도 달천 휴양소로 갔다. 조수 한 명은 내가 일하던 서기실에서 과장으로 있다가 우리들이 쫓겨난 다음에 부실장으로 승진한, 소련유학을 다녀온 경제전문가였다. 다른 한 명은 선전부 이론선전과장으로 있는 양형섭의 처남인 김용원이었다. 그러니까 김일성의 고종사촌동생이었던 것이다.
과거에 나는 그와 그이 처의 지도교수였다. 내가 그를 데려간 것은 마음씨가 착하고 나를 잘 따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김일성 고종사촌들과의 마찰을 무마시키는 데는 내 사업에 그 집안에서 한 명을 동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일이 서툴러서 그 일에 능한 사람이 핑요하기도 했다.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세계관과 사회역사관, 인생관 문제를 새롭게 해명한 뒤로, 나는 예전의 의문을 품고 있던 부분들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르크스의 가장 어려운 저서도 펼쳐보았더니 이론의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가 명백히 이해되고 마르크스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 내가 데리고 나간 경제전문가 조수는 『자본론』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자랑하면서, 나의 새로운 철학적 원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입장이었다. 한번은 그에게 『자본론』을 다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웬걸요.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어려운 고전이라도 좋으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으면 가져오게. 문제에 따라 당장 해명해주지는 못할지 몰라도 하룻밤 만에 반드시 해명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있고난 뒤, 그는 몇 차례 질문할 것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때마다 해명해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나의 철학적 원리의 진리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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