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70회]
- 관리자
- 2010-06-04 10: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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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김정일은 벌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가 삼촌인 김영주를 포함하여 김일성의 측근들까지 제거하는 일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첨의 기본은 아첨해야 할 사람의 적수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서 그 적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은 그 방법을 썼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가장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김일성의 측근 중에서 미리부터 점찍었던 사람들을 충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을, 혹은 무능을 구실로 가차 없이 공격하여 제거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김일성의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 김정일과는 나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일은 참으로 이상하게 꼬여갔다. 김정일이 논문사건은 이론문제인 만큼 나와 김영주 간의 대립을 동시에 흔들어서 김일성의 이론적 권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나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진행시켰다. 그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를 비방하고 자신만이 대립된 두 이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이론을 내놓을 수 있는 이론의 대가인 것처럼 자처하면서 논쟁문제에 대한 결론을 일방적으로 내렸다.
이것이 1967년 5월 25일의 소위 교시라는 것이다. 결국 나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던 서기실 동료들은 모두 쫓겨났다. 나도 지방으로 추방될 것을 각오하고 짐을 싸놓았다. 김일성의 1967년 5월 25일 교시는 북한사회를 특이한 형태의 극좌로 몰아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표면화된 것이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한 이론투쟁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더욱 계급주의적인 입장에서 독재를 강화하고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심화시키려는 통치 집단의 요구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갈망하는 인텔리층 사이의 대립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의 우경 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 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며 중간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민주주의적 인텔리를 반대하고 독재를 강화하려는 데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모방했다.
당시 북한의 민주주의 역량은 정말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정치투쟁으로까지는 번지지 않았으나, 이 일을 계기로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가 더욱 강화되고 ‘인텔리 혁명화’의 구호 아래 인텔리들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일성 배지를 전 인민이 모두 달도록 강요당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마치 내가 인텔리층의 대표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방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강원도에서 건설사업 책임자로 있던 장인이 중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인이 어째서 중국으로 탈출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은 김일성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것은 확실하다.
아첨의 기본은 아첨해야 할 사람의 적수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서 그 적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은 그 방법을 썼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가장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김일성의 측근 중에서 미리부터 점찍었던 사람들을 충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을, 혹은 무능을 구실로 가차 없이 공격하여 제거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김일성의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 김정일과는 나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일은 참으로 이상하게 꼬여갔다. 김정일이 논문사건은 이론문제인 만큼 나와 김영주 간의 대립을 동시에 흔들어서 김일성의 이론적 권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나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진행시켰다. 그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를 비방하고 자신만이 대립된 두 이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이론을 내놓을 수 있는 이론의 대가인 것처럼 자처하면서 논쟁문제에 대한 결론을 일방적으로 내렸다.
이것이 1967년 5월 25일의 소위 교시라는 것이다. 결국 나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던 서기실 동료들은 모두 쫓겨났다. 나도 지방으로 추방될 것을 각오하고 짐을 싸놓았다. 김일성의 1967년 5월 25일 교시는 북한사회를 특이한 형태의 극좌로 몰아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표면화된 것이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한 이론투쟁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더욱 계급주의적인 입장에서 독재를 강화하고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심화시키려는 통치 집단의 요구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갈망하는 인텔리층 사이의 대립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의 우경 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 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며 중간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민주주의적 인텔리를 반대하고 독재를 강화하려는 데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모방했다.
당시 북한의 민주주의 역량은 정말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정치투쟁으로까지는 번지지 않았으나, 이 일을 계기로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가 더욱 강화되고 ‘인텔리 혁명화’의 구호 아래 인텔리들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일성 배지를 전 인민이 모두 달도록 강요당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마치 내가 인텔리층의 대표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방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강원도에서 건설사업 책임자로 있던 장인이 중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인이 어째서 중국으로 탈출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은 김일성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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