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7회]
- 관리자
- 2010-06-04 10:49:00
- 조회수 : 1,660
내가 중앙당 서기가 된 1958년, 김일성은 46세였다. 김일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잤는데, 대신에 오침을 하루1~2시간 씩 했다. 그때만 해도 김일성에게는 별장이 없어 현지지도를 나가면 서기들도 그와 함께 기차 안에서 숙식을 했다. 이른 새벽 잠결에 구둣발 소리를 듣고 내다보면 김일성이 부관과 함께 플랫폼에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달려 나가곤 했다. 오히려 서기들이 문건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질 정도로 김일성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김일성은 매주 한 차례 정치국회의를 열고 필요한 간부들만 참석시켰는데, 우리 서기들은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했다. 정치국회의에서 한 속기록이나 녹음자료는 주요기밀을 다루는 부서인 기요과에서 서기실로 보내주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잘 정리하여 김일성에게 올렸다가 결제가 나면 정식문건으로 발표했다.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그가 소련이나 중국, 동유럽 등에서 받은 원조를 인민생활의 향상에 쓰지 않고 중공업건설에 쓴다고 이구동성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일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중공업을 발전시키지 않고는 자립경제를 이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반대파들의 의견을 반박하고는 했다.
김일성의 중공업정책에 따라 1958년 북한은 자체 힘으로 28마력짜리 트랙터를 생산했고 화물자동차도 생산했다. 그 해 여름 평안북도와 자강도, 양강도 일대를 김일성의 현지지도에 동행하여 둘러봤더니 군수공장들이 이미 지하에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연설문이나 그 밖의 글들을 쓰면서 교과서를 쓸 때와는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그때만 해도 글이라면 어지간히 써본 나였지만 익숙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고충을 겪어야 했다.
서기실에 부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4월 어느 날, 나에게 김일성이 사법검찰들 앞에서 연설할 초안을 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실장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설문을 작성해 올렸는데, 김일성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는 원고 없이 연설을 했다. 나는 첫 시험에서 탈락했다고 낙심했다. 그런데 그 원고 없이 한 연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 생각들을 덧붙여 완성해 올렸다.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는지 김일성은 잘 정리했다고 평가해주었다. 이 연설문은 나중에 김일성의 저작선집에 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기실에서는 김일성의 연설한 내용을 속기해오면 중복되는 대목을 없애고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으로만 알았지 연설내용을 이론적으로 부연하고 품위를 높이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연설문을 정리하면서 이론적 외피를 씌우는 데 주력했다. 그래도 정치논리에 익숙하지 않아 연설문을 작성하는 데는 다른 서기들보다 뒤떨어졌다.
더구나 김일성은 대체로 경제문제에 대한 연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로 경제전문 서기들이 초고를 작성했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적은 편이었다. 덕분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철학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달려 나가곤 했다. 오히려 서기들이 문건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질 정도로 김일성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김일성은 매주 한 차례 정치국회의를 열고 필요한 간부들만 참석시켰는데, 우리 서기들은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했다. 정치국회의에서 한 속기록이나 녹음자료는 주요기밀을 다루는 부서인 기요과에서 서기실로 보내주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잘 정리하여 김일성에게 올렸다가 결제가 나면 정식문건으로 발표했다.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그가 소련이나 중국, 동유럽 등에서 받은 원조를 인민생활의 향상에 쓰지 않고 중공업건설에 쓴다고 이구동성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일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중공업을 발전시키지 않고는 자립경제를 이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반대파들의 의견을 반박하고는 했다.
김일성의 중공업정책에 따라 1958년 북한은 자체 힘으로 28마력짜리 트랙터를 생산했고 화물자동차도 생산했다. 그 해 여름 평안북도와 자강도, 양강도 일대를 김일성의 현지지도에 동행하여 둘러봤더니 군수공장들이 이미 지하에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연설문이나 그 밖의 글들을 쓰면서 교과서를 쓸 때와는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그때만 해도 글이라면 어지간히 써본 나였지만 익숙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고충을 겪어야 했다.
서기실에 부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4월 어느 날, 나에게 김일성이 사법검찰들 앞에서 연설할 초안을 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실장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설문을 작성해 올렸는데, 김일성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는 원고 없이 연설을 했다. 나는 첫 시험에서 탈락했다고 낙심했다. 그런데 그 원고 없이 한 연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 생각들을 덧붙여 완성해 올렸다.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는지 김일성은 잘 정리했다고 평가해주었다. 이 연설문은 나중에 김일성의 저작선집에 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기실에서는 김일성의 연설한 내용을 속기해오면 중복되는 대목을 없애고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으로만 알았지 연설내용을 이론적으로 부연하고 품위를 높이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연설문을 정리하면서 이론적 외피를 씌우는 데 주력했다. 그래도 정치논리에 익숙하지 않아 연설문을 작성하는 데는 다른 서기들보다 뒤떨어졌다.
더구나 김일성은 대체로 경제문제에 대한 연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로 경제전문 서기들이 초고를 작성했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적은 편이었다. 덕분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철학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