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5회]
  • 관리자
  • 2010-06-04 10: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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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농촌에 많이 살았다. 그런데 같은 과부 처지에 있는 여자들이 누이를 가장 괴롭히고 궁지로 몰아넣는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그 여자들 박해에 고분고분 당할 줄 아니” 월남자 가족이라고 박해 받을 이유가 어디 있어?”그러면서 누이는 그들에게 지지 않고 맞서 나갔다.

그런 누이에 대한 걱정이 늘 떠나지 않았는데, 하루는 조직부 부부장이 만나자고 해서 찾아갔더니 누이 문제를 꺼냈다. “승호리 리당에서 신소가 들어왔는데 서기동무의 누이가 리 당이나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의 지시를 잘 안 듣고 또 종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당 총비서의 동지의 귀에 들어가면 공연히 걱정을 끼쳐드릴까봐 그러니 누이를 좀 타일러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며칠 후 나는 누이를 만나 승호리 리 간부들과 관계를 좀 원만하게 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더니, 누이는 리당 간부들과 협동농장 관리위원회 간부들의 비행을 말하면서 내 충고를 도리어 반박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누이와 논쟁을 하다가 지고 말았다. 누이와 리 간부들의 관계는 계속 나쁜 상태였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조카들을 보살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조카는 공부를 잘하여 인민학교 졸업 후 부기원 양성소에 들어가 1등으로 졸업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리 협동농장의 경리책임자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또 엄마를 닮아 정의감이 강하고 일을 원칙대로만 처리하려 했다. 관리위원장의 부정행위를 눈감아주기는커녕 부기원칙에 따라 밝히려고 하다가 미움을 받자 나를 찾아왔다. 질녀의 호소를 들은 나는 어떤 방법으로 도와주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일단 질녀를 타일렀다.

“네가 아무리 옳아도 관리위원장과 정면대결을 해서는 불리하다. 또 그래서도 안 되고 주변에 돕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없을 게 뻔할 테니 정면대결을 피하고 좀 참고 기다려라. 그럼 차츰 나아지겠지.” 질녀는 울면서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뒤로도 계속 관리위원장에게 힘겹게 맞서다가 그만 정신이 돌고 말았다. 누이 얘기를 해주었던 조직부 부부장이 찾아와, 공연히 쓸데없는 문제로 아랫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면 이쪽이 불리할 수도 있으니 누이를 다른 지방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야지요.”결국 나는 누이를 양강도로 옮겨 살게 했다. 누이를 보낼 때는 황비서가 이번에 누이 때문에 직책에서 해임되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1년이 지나자 누이가 나를 찾아왔다. 통행증이 없으면 평양에 올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그곳에서 김일성대학에 다니는 학생한테서 내가 계속 당중앙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학생의 도움을 받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누이를 보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직부 부부장을 찾아가 사정을 전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순천시에 집을 하나 얻어주고 그리로 보냅시다.” 처음부터 누이의 일에 개입되었던 그는 나를 좋게 보기도 했던 터라 선선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누이는 순천시로 이사를 가서 살다가 1996년에 죽었다. 나는 가보고 싶었으나 김일성의 탈상이 끝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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