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3회]
- 관리자
- 2010-06-04 10:4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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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이론서기 시절. 중앙당 비서실.
1958년 1월 3일부터 나는 중앙당 서기실 이론서기라는 직책으로 중앙당에 출근했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 시절에 비서실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하여 자신의 이론서기들을 비서라고 칭하고 그 기구조직을 비서실이라고 불렀다. 이론서기들의 대우는 부부장급이었다.
비서실은 김일성이 당 사업을 주도하면서부터 생겼다고 했다. 내가 이론서기로 들어가자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소련유학 출신이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다. 실장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한 명은 김일성대학 연구원을 나온 자로 중학교 4학년 때 일본 제3고등학교(쿄오토)에 입학했다는 소문난 수재였다. 다른 한 명은 해방 전 서울대학을 졸업한,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인정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이들의 전공은 모두 경제학이었다. 그런데도 글을 잘 썼다. 특히 실장은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글을 구사하는 재사였다. 중앙당의 비서가 되면서 내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처음으로 승용차를 타고, 정부 특별병원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고급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김일성 당 총비서(당시 당 위원장)를 보좌하기 때문에 중앙당 각 부서에서는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에 가끔 우리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부탁하는 일은 가능한 한 들어주려고 애썼다.
또 저녁식사는 경리부에서 무료로 처리해줄 정도였다. 아내는 사범대학 졸업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연극영화대학에서 노어를 가르쳤다. 아무런 걱정 없이 유복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혼자 사는 생모를 모시고 싶다고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니 장모는 어머니가 아니오. 어서 모셔옵시다.” 장모는 장인과 이혼하고 재가했는데 그 남편도 이미 세상을 떴다고 했다.
장모는 재가하여 낳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래서 처제와 처남이 생긴 셈이었는데, 나는 처제를 의과대학에 입학시키고 처남은 기술학원에 보내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당시 중앙위원회에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부장, 부부장, 과장, 지도원이 있었다. 그러다가 훗날 중앙당 위원장이 총비서가 되고 부위원장들이 비서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수의 서기로서의 비서와, 당 중앙지도기관의 구성원으로서의 비서가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내가 몸담은 비서실을 ‘서기실’이라 하고 비서를 ‘서기’라 부르기로 한다. 이론서기 위에 기술서기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총비서인 김일성을 수행하면서 개별적인 심부름을 주로 하는 수행비서였다. 김일성은 우리 서기들을 매우 아꼈으며 정치국회의를 비롯한 모든 중요회의에 참석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하는 회의와 현지지도를 하는 곳에도 동행하게 했다. 김일성은 우리들에게 늘 말했다. “동무들은 내가 말한 내용뿐만 아니라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생각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생각에 맞는 글을 쓸 수가 있다.” 우리 서기들의 기본임무는 김일성의 연설원고를 쓰고, 연설속기록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중에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출판된 『김일성선집』을 개작하는 작업도 들어 있었다.
1958년 1월 3일부터 나는 중앙당 서기실 이론서기라는 직책으로 중앙당에 출근했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 시절에 비서실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하여 자신의 이론서기들을 비서라고 칭하고 그 기구조직을 비서실이라고 불렀다. 이론서기들의 대우는 부부장급이었다.
비서실은 김일성이 당 사업을 주도하면서부터 생겼다고 했다. 내가 이론서기로 들어가자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소련유학 출신이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다. 실장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한 명은 김일성대학 연구원을 나온 자로 중학교 4학년 때 일본 제3고등학교(쿄오토)에 입학했다는 소문난 수재였다. 다른 한 명은 해방 전 서울대학을 졸업한,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인정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이들의 전공은 모두 경제학이었다. 그런데도 글을 잘 썼다. 특히 실장은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글을 구사하는 재사였다. 중앙당의 비서가 되면서 내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처음으로 승용차를 타고, 정부 특별병원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고급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김일성 당 총비서(당시 당 위원장)를 보좌하기 때문에 중앙당 각 부서에서는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에 가끔 우리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부탁하는 일은 가능한 한 들어주려고 애썼다.
또 저녁식사는 경리부에서 무료로 처리해줄 정도였다. 아내는 사범대학 졸업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연극영화대학에서 노어를 가르쳤다. 아무런 걱정 없이 유복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혼자 사는 생모를 모시고 싶다고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니 장모는 어머니가 아니오. 어서 모셔옵시다.” 장모는 장인과 이혼하고 재가했는데 그 남편도 이미 세상을 떴다고 했다.
장모는 재가하여 낳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래서 처제와 처남이 생긴 셈이었는데, 나는 처제를 의과대학에 입학시키고 처남은 기술학원에 보내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당시 중앙위원회에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부장, 부부장, 과장, 지도원이 있었다. 그러다가 훗날 중앙당 위원장이 총비서가 되고 부위원장들이 비서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수의 서기로서의 비서와, 당 중앙지도기관의 구성원으로서의 비서가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내가 몸담은 비서실을 ‘서기실’이라 하고 비서를 ‘서기’라 부르기로 한다. 이론서기 위에 기술서기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총비서인 김일성을 수행하면서 개별적인 심부름을 주로 하는 수행비서였다. 김일성은 우리 서기들을 매우 아꼈으며 정치국회의를 비롯한 모든 중요회의에 참석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하는 회의와 현지지도를 하는 곳에도 동행하게 했다. 김일성은 우리들에게 늘 말했다. “동무들은 내가 말한 내용뿐만 아니라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생각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생각에 맞는 글을 쓸 수가 있다.” 우리 서기들의 기본임무는 김일성의 연설원고를 쓰고, 연설속기록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중에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출판된 『김일성선집』을 개작하는 작업도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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