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38회]
- 관리자
- 2010-06-04 11:19:56
- 조회수 : 13,023
나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고 했다던 어느 프랑스 왕비의 얘기와,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는다고 보고하자 왜 꿀을 안 먹느냐고 했다는 어느 러시아 황제의 일화가 생각났다. 나는 이 초지조성 사업만은 도저히 찬성할 수 없어, 우선 시험적으로 경험을 좀 쌓은 다음 전면적으로 착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비서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지시이기 때문에 당장에 1개도씩 나가 초지조성 사업을 지도하자고 주장했다. 나는 별 수 없이 국제비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대사관들을 통해 풀씨나 구해오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
김정일은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총리를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이 경제를 정상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했다. 그는 당의 경제와 근대의 경제를 국가경제로부터 분리하여 자신의 개인소유처럼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도 특수 권력기관들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보장해주는 방향에서 관리하도록 간섭했다. 한 예로 1996년에는 전력생산이 소요량의 5분의 1도 채 안되자 특수기관들에서는 저마다 자기기관에 전력을 우선적으로 공급해달라는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직접 올려 서명을 받았다.
김정일의 서명을 받은 문건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법적 문건이다. 그리하여 특수 권력기관들에서는 이 문건을 가지고 정무원 전력공업부를 찾아가 전기를 달라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전력공업부는 강요와 협박에 견디다 못해 자기들로서는 이 문제를 도저히 처리할 수 없다며 김정일에게 신소를 제기했다. 그래서 김정일이 우리 비서들에게 사태를 바로잡으라고 지시하기에 비서들이 모여 내막을 알아보았더니, 특수 권력기관들에서 전력공급과 관련하여 총리를 거치지 않고 김정일에게 직접 비준을 받은 것이 190건이나 되었다.
김정일이 경제를 경제전문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이처럼 무책임하게 간섭하다 보니, 설사 정무원 총리가 몇 명이 된들 경제는 엉망진창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일이 잦았다.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여러 곳을 전전하다 보니 자전거가 많이 이용되었고, 또 연약한 여성들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니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거리에 나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자전거 뒤에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것이 보기 싫다. 조선의 미풍양속에 맞지 않으니 금지시켜라.’라고 하여 그때부터는 자전거 뒤에 여성을 태울 수 없게 되었다.
과연 김정일은 평생 단 한 끼라도 굶어본 적이 있었을까. 부화방탕한 생활을 마음껏 즐기던 자가 과연 미풍양속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또 도덕에 대해 말한다면, 북한에서 도덕을 파괴한 장본인은 바로 김정일 자신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기 전에는 북한주민들의 도덕상태가 매우 건전하였다.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학생들의 도덕 상태는 나무랄 데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원산시의 한 사회안전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즉, 김대 경제학부 재학생이 저수지에서 얼음을 타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 고맙다는 감사의 편지였다.
나는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던 터라 경제학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다. 그러자 경제학부장도 모르고 있었다. 본인을 불러 알아보았더니 사연은 이랬다. 경제학부 졸업반 학생 2명이 어느 날 원산에 실습을 나갔는데,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저수지에서 한 아이가 얼음을 타다가 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다. 날이 따뜻해 얼음이 녹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다가 물에 빠진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즉시 물속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내 인근 농가에 맡기고 실습을 떠났다. 저녁 늦도록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이 아이를 찾아 나선 끝에 농가에 누워 있는 자기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문을 몰라 수소문을 했더니 같이 놀던 애들의 말이 대학생처럼 보이는 두 청년이 구해주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마침 아이의 아버지가 사회안전원이어서 원산시내의 여관과 여인숙에 전화를 걸어 젖은 옷을 입고 찾아온 손님이 있었는지를 알아본 결과 두 학생을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두 학생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는 어째서 좋은 일을 하고도 학교당국이나 사로청 조직에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뭐, 다른 사람 애를 구한 것도 아니고 우리 아이를 구했는데 보고까지야 할 게 있겠습니까?” 결국 같은 나라 아이는 자기 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훗날 대학에 남아 경제학부의 우수한 교수가 되었다.
김정일은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총리를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이 경제를 정상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했다. 그는 당의 경제와 근대의 경제를 국가경제로부터 분리하여 자신의 개인소유처럼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도 특수 권력기관들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보장해주는 방향에서 관리하도록 간섭했다. 한 예로 1996년에는 전력생산이 소요량의 5분의 1도 채 안되자 특수기관들에서는 저마다 자기기관에 전력을 우선적으로 공급해달라는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직접 올려 서명을 받았다.
김정일의 서명을 받은 문건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법적 문건이다. 그리하여 특수 권력기관들에서는 이 문건을 가지고 정무원 전력공업부를 찾아가 전기를 달라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전력공업부는 강요와 협박에 견디다 못해 자기들로서는 이 문제를 도저히 처리할 수 없다며 김정일에게 신소를 제기했다. 그래서 김정일이 우리 비서들에게 사태를 바로잡으라고 지시하기에 비서들이 모여 내막을 알아보았더니, 특수 권력기관들에서 전력공급과 관련하여 총리를 거치지 않고 김정일에게 직접 비준을 받은 것이 190건이나 되었다.
김정일이 경제를 경제전문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이처럼 무책임하게 간섭하다 보니, 설사 정무원 총리가 몇 명이 된들 경제는 엉망진창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일이 잦았다.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여러 곳을 전전하다 보니 자전거가 많이 이용되었고, 또 연약한 여성들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니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거리에 나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자전거 뒤에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것이 보기 싫다. 조선의 미풍양속에 맞지 않으니 금지시켜라.’라고 하여 그때부터는 자전거 뒤에 여성을 태울 수 없게 되었다.
과연 김정일은 평생 단 한 끼라도 굶어본 적이 있었을까. 부화방탕한 생활을 마음껏 즐기던 자가 과연 미풍양속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또 도덕에 대해 말한다면, 북한에서 도덕을 파괴한 장본인은 바로 김정일 자신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기 전에는 북한주민들의 도덕상태가 매우 건전하였다.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학생들의 도덕 상태는 나무랄 데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원산시의 한 사회안전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즉, 김대 경제학부 재학생이 저수지에서 얼음을 타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 고맙다는 감사의 편지였다.
나는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던 터라 경제학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다. 그러자 경제학부장도 모르고 있었다. 본인을 불러 알아보았더니 사연은 이랬다. 경제학부 졸업반 학생 2명이 어느 날 원산에 실습을 나갔는데,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저수지에서 한 아이가 얼음을 타다가 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다. 날이 따뜻해 얼음이 녹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다가 물에 빠진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즉시 물속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내 인근 농가에 맡기고 실습을 떠났다. 저녁 늦도록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이 아이를 찾아 나선 끝에 농가에 누워 있는 자기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문을 몰라 수소문을 했더니 같이 놀던 애들의 말이 대학생처럼 보이는 두 청년이 구해주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마침 아이의 아버지가 사회안전원이어서 원산시내의 여관과 여인숙에 전화를 걸어 젖은 옷을 입고 찾아온 손님이 있었는지를 알아본 결과 두 학생을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두 학생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는 어째서 좋은 일을 하고도 학교당국이나 사로청 조직에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뭐, 다른 사람 애를 구한 것도 아니고 우리 아이를 구했는데 보고까지야 할 게 있겠습니까?” 결국 같은 나라 아이는 자기 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훗날 대학에 남아 경제학부의 우수한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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