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30회]
- 관리자
- 2010-06-04 11:17:05
- 조회수 : 13,028
코펜하겐 토론회에는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파들이 참가했지만,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일찍이 나와 함께 공부한 옛 친구들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과 러시아 공산당 국제비서 등이 참가했다. 그 국제비서는 고르바초프가 총서기로 있을 때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청년사업담당비서를 한 바 있는 똑똑한 젊은 간부였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 역시 새로운 지도사상을 모색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나는 「인류의 광명한 미래를 위하여」라는 주체사상 선전요강을 김덕홍에게 만들어주었다. 또 「철학의 사명」을 비롯하여 코펜하겐 토론회를 위해 만든 자료들을 주어, 재단사업과 함께 주체사상 선전도 벌이도록 했다. 덕홍은 국가보위부 과장(대좌)을 데리고 다니며 일했으며, 대사관에서는 당 비서와 안전책임자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국제주체재단은 그런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국내에서는 인민들이 굶주리며 죽어가는 데도 멀리 외국에까지 나가 김정일의 생일축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 판국에 어떻게 외국의 학자들과 인류의 광명한 미래를 논하고 철학의 사명을 논하며 사상선전을 지시할 수 있느냐 하고 의아해하는 눈길도 있을 것이다. 실로 그렇다. 내게 주어진 과업이고 또 당장은 그걸 마다할 특별한 핑곗거리도 업어 그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 순간 고통받는 인민들을 나는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철학자의 열정으로 주체의 이론을 펴나가다가도, 그들을 떠올리면 갑작스레 치미는 슬픔과 연민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이었다. 그 해의 식량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그런 사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경찰 망을 더욱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반체제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주동자를 색출해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했다.
한번은 중앙당내의 보위관계를 관리하는 요원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말하기를, “사무실에는 도청장치가 되어 있고, 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니터로 샅샅이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모두 기록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반김정일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학생들이 대부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채 결국 총살을 당하러 가는 줄을 알면서도 뒤에 남은 학생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라고 덤덤히 인사를 남기고는 최후를 맞는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그런 광경을 매일 접하다 보니 도저히 술을 안 마시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끼리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자이며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황 비서동지만은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갖고 있던 약간의 외화를 주며 동료들과 술이라도 한잔 하라고 했다. 그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그 돈을 받아갔다.
그 역시 새로운 지도사상을 모색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나는 「인류의 광명한 미래를 위하여」라는 주체사상 선전요강을 김덕홍에게 만들어주었다. 또 「철학의 사명」을 비롯하여 코펜하겐 토론회를 위해 만든 자료들을 주어, 재단사업과 함께 주체사상 선전도 벌이도록 했다. 덕홍은 국가보위부 과장(대좌)을 데리고 다니며 일했으며, 대사관에서는 당 비서와 안전책임자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국제주체재단은 그런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국내에서는 인민들이 굶주리며 죽어가는 데도 멀리 외국에까지 나가 김정일의 생일축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 판국에 어떻게 외국의 학자들과 인류의 광명한 미래를 논하고 철학의 사명을 논하며 사상선전을 지시할 수 있느냐 하고 의아해하는 눈길도 있을 것이다. 실로 그렇다. 내게 주어진 과업이고 또 당장은 그걸 마다할 특별한 핑곗거리도 업어 그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 순간 고통받는 인민들을 나는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철학자의 열정으로 주체의 이론을 펴나가다가도, 그들을 떠올리면 갑작스레 치미는 슬픔과 연민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이었다. 그 해의 식량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그런 사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경찰 망을 더욱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반체제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주동자를 색출해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했다.
한번은 중앙당내의 보위관계를 관리하는 요원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말하기를, “사무실에는 도청장치가 되어 있고, 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니터로 샅샅이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모두 기록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반김정일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학생들이 대부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채 결국 총살을 당하러 가는 줄을 알면서도 뒤에 남은 학생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라고 덤덤히 인사를 남기고는 최후를 맞는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그런 광경을 매일 접하다 보니 도저히 술을 안 마시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끼리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자이며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황 비서동지만은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갖고 있던 약간의 외화를 주며 동료들과 술이라도 한잔 하라고 했다. 그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그 돈을 받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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