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16회]
  • 관리자
  • 2010-06-04 11: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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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김정일이 나를 이론가로서 이용했기 때문에 이쪽을 쉽게 버리지도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더구나 며느릿감도 착하고 예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김정일에게 사태를 보고했다. 김정일은 내 말을 다 듣더니 불쑥 말했다. “젊은것들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혼시킵시다.” 나는 아들의 결혼에 대해 혼자서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성택이나 김경희는 당의 원칙을 지켜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정일이 장성택과 김경희를 불러 쓸데없는데 간섭한다며 욕을 한 모양이었다.

장성택은 김정일에게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어서 그냥 넘겼지만, 김경희는 약이 올라 아내에게 절교선언을 해왔다. 아내는 물론 아이들도 모두 김경희의 절교선언에 놀라 더 이상 결혼을 진척시키지 말고 김경희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만일 경모가 권력의 압력에 못 이겨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게 된다면 일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이고, 또한 처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방해책동이 심해질수록 내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모험이었다. 김정일도 이 결혼에 대해 겉으로는 찬성한다고 했지만 내심 반대하는 눈치였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하면, 비서의 자제가 결혼을 하게 되면 김정일이 선물을 보내주는 것이 동례였다. 내 둘째딸이 결혼할 때만 해도 그는 훌륭한 선물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결혼식 날짜를 알렸지만 경모가 내 외아들임을 잘 알면서도 김정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어쨌든 경모는 장성택의 생지로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첫 손녀가 태어났다. 나는 그 손녀에게 지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애를 보기까지 복잡한 사연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지현이를 극진히 사랑했다. 김경희가 우리와 관계를 끊자, 반대파들은 좋아라며 나를 공격할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나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1992년은 김일성의 80회 생일과 김정일의 50회 생일이 낀 해였다. 김일성은 이미 예전의 김일성이 아니었다.
원기도 사라지고 어떡하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성공적으로 넘겨줄까 하는 문제만 생각하는 노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 김정일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것도 눈에 자주 띄고, 또 소문으로도 들려왔다. 한 예로 누구도 아닌 자기 아들의 50회 생일을 칭송하는 송시를 썼는가 하면, 심지어 이를 비석에 새겨 백두산 소백수골 안에 꾸며 놓은 김정일 생가 근처에 세워두기까지 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김일성의 송시라는 것을 팩스로 받아보고는 아연실색했다.

나는 언제나 역사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김일성이 김정일의 생가를 꾸미고 송시를 쓴 것은 그의 일생에서 아마도 최대의 과오 가운에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형편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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