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14회]
  • 관리자
  • 2010-06-04 11: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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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노리고 있던 선전부의 일부 일꾼들은 사회과학원의 교조주의자들과 합세하여 나에 대한 공격자료를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료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질 만큼의 분량이 되었다.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비서고 뭐고 다 그만두고 평당원으로 나앉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내 생각을 넌지시 비쳤더니 정신 나갔다면서 펄쩍 뛰었고, 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없이 추이만 살폈다. 결국 그 일은 애매하게 내 조수역을 한 과장(주체사상연구소에서 내가 데려온 학자)만 비판받는 걸로 낙착을 보았다.

김정일은 아직은 나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은근히 내쪽을 다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철학문제에 대해서도 나를 지도할 능력이 있음을 시위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뜻이었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수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주체사상연구소나 자료연구실 학자들이 토론하는 것은 무방합니다. 하지만 이번 글은 내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습니다. 참, 그리고 이번에 부부동반해서 중국으로 두어 주일 휴양을 다녀오시지요.”

김정일이 우리 부부를 국내도 아닌 외국으로 휴가를 보내주는 것은 하나의 선심이었다. 그리하여 1990년 11월, 나는 부부동반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으로 휴양을 떠났다. 내 마음은 줄곧 무거웠으나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내는 대부분의 북한의 선량한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에게 환상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김정일에 대해서도 그의 방탕한 사생활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좋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김정일도 내 아내에게는 잘 대해서 친필감사장을 주고 인민기자라는 최고의 명예호칭도 내렸으며, 자식들이 하나같이 공부를 잘하고 일도 잘 한다면서 행복한 가정의 표본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선전이 필요하면 아내를 먼저 내세웠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내막을 잘 모르는 인민들 사이에서 어딜 가나 떠받들어지는 입장이었다. 아내는 가정생활은 물론 개인생활에 대해서도 명예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로서는 아내의 만족감을 애써 깰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당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일들과 나의 사상적 고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입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자유의 품으로 망명을 하면서까지 아내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잘못인 것 같다. 아내가 지금 나를 얼마나 원망할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중국에서는 우리 부부를 극진히 환대해주었다. 우리는 중국의 고위간부들과도 만나 두 나라의 당과 인민의 친선을 위해 뜻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1987년부터 만성후두염을 앓고 있어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일체의 강연을 면제받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그들은 이틀 동안 나의 건강상태를 정밀히 검사하여 약을 지어주었다. 나와 아내는 사천성의 고적 등을 돌아보면서 중국인민들의 활기찬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양자강을 내려오면서 삼협과 소삼협의 웅장하고 기묘한 자연의 조화도 감상할 수 있었고, 새 중국의 찬란한 미래를 상상해보면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이 위대한 나라를 정복하려 한 것이 얼마나 허망한 꿈이었던가를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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