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07회]
- 관리자
- 2010-06-04 1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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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내 신분이 자유로운 학자가 아니라 고위공직자이기 때문에 참가할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답장을 했다. 그러자 다음 편지에 남한에서는 문익환 목사가 참가하기로 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최고위급 학자들이 참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중국, 러시아에서도 저명한 학자들이 참가한다고 알려왔다. 해방 전 강제로 귀국행 배를 탄 후로 일본에 간 일이 없던 나는 일본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었다. 또 일본의 학자들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김정일에게 일본에서 열리는 학술토론회가 상당한 수준이며, 이 기회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공산당의 책임간부들과 만나 양당간의 관계를 정상화해보겠다는 의견서를 올렸다. 나로서도 내가 고위공직자인 까닭에 원래는 허용되지 않는 일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 부자의 욕심과 나의 출장계획이 맞아떨어져 승인이 났다. 말하자면 일본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일본공산당과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북한으로서는 분명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외출장이 이루어졌다. 평양을 떠나 베이징에서 토오쿄오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카모토 교수한테서 급한 연락이 왔다. 내용은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부끄러운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정부는 조선노동당 간부의 입국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유엔대학은 일본정부의 관할 내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유엔대학이 개최하는 국제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은 막지 못하지만, 다른 활동은 일체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두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평양에 연락하여 지시를 내려주기를 요청했더니, 일본으로 가든지 돌아오든지 나더러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나 대사관의 몇몇 사람들과 협의해보니 전에도 일본정부가 그렇게 선포했다가 막상 들어가면 활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이왕에 떠나왔으니 일본까지 가리라고 결심했다. 조선노동당 비서와 같은 고위급 당 간부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래선지 일본정부의 경계는 철저했다. 게다가 대한항공 폭파사건이 발생한 터라, 그 경계는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내가 묵은 요코하마 숙소를 7~8명의 일본경찰이 지켰으며, 호텔에서 국제세미나장까지는 고작 100미터 거리였는데도 사복경찰들이 빈틈없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북해도나 오키나와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당하는 조치가 부당하다며 격분하고 개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국제세미나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결국 일본공산당과의 관계개선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12월 하순 평양으로 돌아와야 했다.
평양에 돌아와서야 나는 베이징에서 내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김일성이 노여워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일본으로 간 것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의 내 행동이 고위급 당 간부로서는 신중치 못한 모험적인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주체사상의 대외선전이 잘 되어 자만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김일성의 노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정일에게 일본에서 열리는 학술토론회가 상당한 수준이며, 이 기회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공산당의 책임간부들과 만나 양당간의 관계를 정상화해보겠다는 의견서를 올렸다. 나로서도 내가 고위공직자인 까닭에 원래는 허용되지 않는 일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 부자의 욕심과 나의 출장계획이 맞아떨어져 승인이 났다. 말하자면 일본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일본공산당과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북한으로서는 분명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외출장이 이루어졌다. 평양을 떠나 베이징에서 토오쿄오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카모토 교수한테서 급한 연락이 왔다. 내용은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부끄러운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정부는 조선노동당 간부의 입국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유엔대학은 일본정부의 관할 내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유엔대학이 개최하는 국제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은 막지 못하지만, 다른 활동은 일체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두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평양에 연락하여 지시를 내려주기를 요청했더니, 일본으로 가든지 돌아오든지 나더러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나 대사관의 몇몇 사람들과 협의해보니 전에도 일본정부가 그렇게 선포했다가 막상 들어가면 활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이왕에 떠나왔으니 일본까지 가리라고 결심했다. 조선노동당 비서와 같은 고위급 당 간부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래선지 일본정부의 경계는 철저했다. 게다가 대한항공 폭파사건이 발생한 터라, 그 경계는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내가 묵은 요코하마 숙소를 7~8명의 일본경찰이 지켰으며, 호텔에서 국제세미나장까지는 고작 100미터 거리였는데도 사복경찰들이 빈틈없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북해도나 오키나와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당하는 조치가 부당하다며 격분하고 개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국제세미나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결국 일본공산당과의 관계개선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12월 하순 평양으로 돌아와야 했다.
평양에 돌아와서야 나는 베이징에서 내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김일성이 노여워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일본으로 간 것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의 내 행동이 고위급 당 간부로서는 신중치 못한 모험적인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주체사상의 대외선전이 잘 되어 자만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김일성의 노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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