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1회]
  • 관리자
  • 2010-06-04 10: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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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실권장악

1973년 초부터 나는 평양 근교의 철봉리 휴양소에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 철봉리는 큰길에서 멀지 않은 산골짜기였는데, 저수지가 있고 양쪽에는 높지 않은 솔밭 우거진 산이 있었다. 그곳은 중앙당에서 최초로 세운 휴양소였다. 그래서 방도 몇 개 안 되었고 집도 초라했지만 글T는 작업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나는 이미 1961년 제4차 당대회를 서기실에서 준비할 때 그곳을 한 체례 이용한 적이 있었다. 휴양소의 역사가 길다 보니 주변에는 과일이나무들이 제법 많았다. 앵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오얏나무, 그리고 특히 대추나무와 밤나무가 많았다. 내가 철봉리 휴양소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 중앙당의 실권은 서서히 김정일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봉건사상이 농후한 북한의 실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김정일에 대한 아첨행각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일부 사람들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원로들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 항일투사 가운데 그런 견해를 내놓을 만한 인물도 없었고, 무엇보다 설사 그런 의견을 내놓은 설사 그런 의견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김일성이 조금이라도 반대의사를 표시했다면 그렇게 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습승계가 이루어진 것은 일인독재가 확고해지고 장기화되면서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현대적인 정치감각이 부족하고 봉건사상이 농후하여 나라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김정일 역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인 것도 작용했다.

1974년 2월의 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동생 김영주에 대해 사업의욕이 없고 자신을 잘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누구도 김일성의 비판에 이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영주는 당 전원회의에서 부총리로 강등되었다. 내가 아는 김영주는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소련유학도 하여 서양식 생활에 대해서도 일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김일성보다도 낫고 김정일과는 상대가 안될 정도였다.

그런 만큼 권력투쟁에서 교활하고 무자비한 김정일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전비서 김도만과 국제비서 박용국은 김영주의 좌우 양 날개였다. 이들은 다 같이 소련유학출신으로서 극단의 좌경을 반대했으며 개인숭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김영주는 이 두 사람을 자신의 생명처럼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결국 두 사람이 쫓겨나게 되자, 그의 기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김정일은 김영주가 부총리에 있는 것도 껄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주를 양강도의 어느 산골로 보내 연금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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