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0회]
- 관리자
- 2010-06-04 10: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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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장으로 피선되었다. 헌법은 김일성이 기본방향을 제시했고 실무진에서 작성했다. 헌법초안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토론에 부쳐졌으며, 나도 몇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제기된 의견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회의석상에서 직접 결론을 내려, 결국 최고인민회의에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새 헌법에 의해 국가주석제가 생겼으며, 최고인민호의 상설회의라는 기구도 생겼다. 그때까지는 소련식으로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을 겸하고 명목상의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호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맡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최고 소비에트회의를 최고 주권기관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최고 소비에트회의 상임위원회가 최고 주권기관을 대표하며 그 상임위원장이 명목상의 국가수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북한은 이러한 소련식을 모방하고 있었다. 새 헌법에서는 당 총비서가 국가수반인 국가주석 자리에 앉히고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초고인민회의 일을 하지만 상설회의 의장은 명목상으로도 국가수반 자격은 주어지지 않고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자격만 갖도록 했다. 따라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곧 상설회의 의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신문들은 내가 명목상으로라도 국가수반이 된 줄 알고 크게 보도하여 나는 몹시 당황했다.
1970년 어느 날 나는 김일성을 독대했다. 나는 서기실에 있을 때와 달리 대학에서 일을 하려니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잘 몰라 실수를 할지도 모르고, 또 정세에 어두워 이론연구에 지장이 있으니 다시 당에 들어가 가까이서 모시고 일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김대 총장은 아무나 시킬 수 없는 자리요. 동무와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어보겠소.”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조선과학자협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법률가협회나 조선학생동맹과 마찬가지로 조선과학자협회는 실체가 없는 유령단체였다.
이 단체는 대외적으로 성명을 발표할 때 필요하여 만든 단체였다. 내가 맡기 전까지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이었던 백남운이 위원장으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김일성이 나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시키려나 하고 생각하다가 내 나이가 너무 젊은 것이 걸려 그생각을 떨쳐버렸다. 그 무렵부터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국회외교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국회외교를 맡기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나를 의장으로 뽑게 한 것도 국회대표단을 접견하는 기회를 통해 나를 자주 만나려는 배려로 이해되었다. 나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이 되면서 월급도 50원이 올라 정부 부장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상설회의 청상에도 내 방이 있었고, 서기도 배치되었다. 학습회에도 김일, 임춘추, 박성철, 오진우 등과 같은 국가원로들과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매년 몇 차례씩 외국을 방문했으며,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 대표들과 학자 대표단을 접견할 때도 동석할 수 있었다. 1972년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금시계를 받았는데, 김일성이 그 대상을 직접 검토하여 핵심간부들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새 헌법에 의해 국가주석제가 생겼으며, 최고인민호의 상설회의라는 기구도 생겼다. 그때까지는 소련식으로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을 겸하고 명목상의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호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맡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최고 소비에트회의를 최고 주권기관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최고 소비에트회의 상임위원회가 최고 주권기관을 대표하며 그 상임위원장이 명목상의 국가수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북한은 이러한 소련식을 모방하고 있었다. 새 헌법에서는 당 총비서가 국가수반인 국가주석 자리에 앉히고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초고인민회의 일을 하지만 상설회의 의장은 명목상으로도 국가수반 자격은 주어지지 않고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자격만 갖도록 했다. 따라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곧 상설회의 의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신문들은 내가 명목상으로라도 국가수반이 된 줄 알고 크게 보도하여 나는 몹시 당황했다.
1970년 어느 날 나는 김일성을 독대했다. 나는 서기실에 있을 때와 달리 대학에서 일을 하려니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잘 몰라 실수를 할지도 모르고, 또 정세에 어두워 이론연구에 지장이 있으니 다시 당에 들어가 가까이서 모시고 일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김대 총장은 아무나 시킬 수 없는 자리요. 동무와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어보겠소.”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조선과학자협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법률가협회나 조선학생동맹과 마찬가지로 조선과학자협회는 실체가 없는 유령단체였다.
이 단체는 대외적으로 성명을 발표할 때 필요하여 만든 단체였다. 내가 맡기 전까지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이었던 백남운이 위원장으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김일성이 나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시키려나 하고 생각하다가 내 나이가 너무 젊은 것이 걸려 그생각을 떨쳐버렸다. 그 무렵부터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국회외교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국회외교를 맡기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나를 의장으로 뽑게 한 것도 국회대표단을 접견하는 기회를 통해 나를 자주 만나려는 배려로 이해되었다. 나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이 되면서 월급도 50원이 올라 정부 부장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상설회의 청상에도 내 방이 있었고, 서기도 배치되었다. 학습회에도 김일, 임춘추, 박성철, 오진우 등과 같은 국가원로들과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매년 몇 차례씩 외국을 방문했으며,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 대표들과 학자 대표단을 접견할 때도 동석할 수 있었다. 1972년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금시계를 받았는데, 김일성이 그 대상을 직접 검토하여 핵심간부들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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