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69회]
  • 관리자
  • 2010-06-04 10: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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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20돌이 되는 해였다.

김일성과 당의 주요간부들이 모두 참석하여 20돌 행사를 치렀는데, 김일성은 자리를 쉬 뜨지 않고 대학의 문예서클 공연까지 보는 관심을 보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일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창립 20돌 기념논문집에 실린 내 논문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논문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문제를 다룬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글이었다.

내가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이러했다. 나는 7년간이나 대학강단을 떠나 중앙당에서 근무하다가 총장이 되어 돌아왔다. 대학에 돌아와 옛 동료들을 만나보고는 그들과 나 사이에 정치 수준이나 과학이론 수준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서기실에는 내외 정세자료가 집중되고 공부할 시간도 많아 교수보다 조건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옛 동료들은 내가 총장으로 부임하자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배운다는 자세로 나를 대했고, 이구동성으로 20돌을 경축하는 논문집에 논문을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논문의 내용을 기억하면 이렇다. 소련공산당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는 끝난다고 한다. 이때부터 프롤레타리아독재 역시 약화되며 국가는 점차 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에서 말하는 과도기는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 이상사회가 실현될 때까지 지속되며, 그때까지 계급투쟁도 계속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독재도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과도기의 종식은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수립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에 상응한 사회주의적 생산력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제도가 자체의 우월성을 충분히 발양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북이 분단되어 대립하고 있는 조건에서 조국이 통일될 때에야 과도기가 끝나며, 그때까지는 남북간의 계급투쟁이 계속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독재 정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회발전에서의 인텔리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면서, 인텔리들을 그 출신성분과 결부시켜 활동의 진보성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가 사회발전에 기여한 결과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문이 발표되자 김대에서는 독창적인 견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김일성의 고종사촌 매부 양형섭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김영주는 당의 조직부장으로서 사실상 북한내 2인자였고, 양형섭은 중앙당학교 교장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규모 면에서나 학자의 지명도에서 중앙당학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했지만, 중앙당학교는 중앙당 직속이라는 것을 내세워 김일성종합대학과 경쟁하려고 했다. 김영주는 모스크바 종합대학 법학부 출신이고, 양형섭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하고 연구원을 졸업했다. 두 사람은 내 논문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약화시키는 반당적 수정주의의 글이라고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김영주는 나에게 악감정은 없었으나 평소의 자기주장과 다른 글을 썼다는 데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정적인 남로당파와 소련파, 연안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일찍이 빨치산과 연대해 국내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갑산파를 몰아내던 중이었다. 그 중에는 김영주의 측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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