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2회]
- 관리자
- 2010-06-04 11:02:04
- 조회수 : 1,560
나는 그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물어보았다. “왜 배꼽 부분만 녹이 슬지 않고 반짝반짝 빛이 납니까?” “ 이 보살은 배가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인민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 아픈 사람들이 찾아와 보살의 배를 만지며 기도를 드리는 것이죠.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보살의 배를 만지다 보니 그 부분만 녹이 슬지 않았지요.”
“부상께서도 배가 아프면 이곳에 와 보살의 배를 만지면서 기도합니까?” “아닙니다. 나야 곧바로 의사한테 전화를 걸지요.” “불교를 믿지 않습니까?” “믿지요. 불교를 믿는 이곳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 무지한 대중들은 보살이 진짜 배를 고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인텔리들은 그렇게 믿지 않지요.” “그럼 왜 불교를 믿으십니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지요.” “마음의 평화라니요?”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하여 절대적인 것, 영생하는 것을 믿고 싶어지거든요.”
“부상께서는 방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 아픈 것을 고쳐주는 보살은 존재하지 않아도 절대적인 것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인생이 무의미하거든요.” “그럼 절대적 존재가 있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야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칸트도 순수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기왕에 믿을 바에는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믿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어디 그런 게 있을라구요. 사람은 다 죽기 마련이고 죽으면 흙이 되는 데요.” “부상께서는 왜 사람의 생명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봅니까? 개인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미얀마 인민이야 죽습니까? 우리 개인들은 죽어도 인류는 계속 살아 있고 더 번영해 나갑니다. 물론 민족이나 인류도 절대적 존재는 아니지요. 사람이 지나치게 교만해져 자기비판을 하지 않고 타락하게 되면 인류도 멸망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인간이 정상적으로 자기과오를 비판하고 서로 사랑하며 협조해 나간다면 인류는 영원히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의 유한한 생명을 인류의 무한한 생명과 결부시키고 인류의 영원한 번영·발전을 위하여 한 생을 바쳐 나간다면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부상은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훗날 나는 미얀마에서 나누었던 그 대화를 문득 떠올리곤 했다. 마음의 평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개인의 유한한 생명과 인류의 무한한 생명을 결부시켜 다 같이 보람차게 사는 미래사회를 건설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러나 과학교육비서로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학총장 시절 나는 한때 고학교육비서가 된다면 과학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담한 정책을 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과학교육비서가 되고 보니 내 능력으로는 과학교육분야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부상께서도 배가 아프면 이곳에 와 보살의 배를 만지면서 기도합니까?” “아닙니다. 나야 곧바로 의사한테 전화를 걸지요.” “불교를 믿지 않습니까?” “믿지요. 불교를 믿는 이곳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 무지한 대중들은 보살이 진짜 배를 고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인텔리들은 그렇게 믿지 않지요.” “그럼 왜 불교를 믿으십니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지요.” “마음의 평화라니요?”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하여 절대적인 것, 영생하는 것을 믿고 싶어지거든요.”
“부상께서는 방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 아픈 것을 고쳐주는 보살은 존재하지 않아도 절대적인 것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인생이 무의미하거든요.” “그럼 절대적 존재가 있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야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칸트도 순수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기왕에 믿을 바에는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믿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어디 그런 게 있을라구요. 사람은 다 죽기 마련이고 죽으면 흙이 되는 데요.” “부상께서는 왜 사람의 생명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봅니까? 개인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미얀마 인민이야 죽습니까? 우리 개인들은 죽어도 인류는 계속 살아 있고 더 번영해 나갑니다. 물론 민족이나 인류도 절대적 존재는 아니지요. 사람이 지나치게 교만해져 자기비판을 하지 않고 타락하게 되면 인류도 멸망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인간이 정상적으로 자기과오를 비판하고 서로 사랑하며 협조해 나간다면 인류는 영원히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의 유한한 생명을 인류의 무한한 생명과 결부시키고 인류의 영원한 번영·발전을 위하여 한 생을 바쳐 나간다면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부상은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훗날 나는 미얀마에서 나누었던 그 대화를 문득 떠올리곤 했다. 마음의 평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개인의 유한한 생명과 인류의 무한한 생명을 결부시켜 다 같이 보람차게 사는 미래사회를 건설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러나 과학교육비서로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학총장 시절 나는 한때 고학교육비서가 된다면 과학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담한 정책을 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과학교육비서가 되고 보니 내 능력으로는 과학교육분야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