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4회]
- 관리자
- 2010-06-04 10: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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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권력을 김정일에게 나누어주면서 사고방식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였는데, 그가 했던 말들이 그걸 입증해준다.
이전의 그는 달랐다. 누가 그의 항일투쟁을 폄하하면 솔직하게 받아쳤다. “우리는 일제와 조금밖에 못 싸웠지만 그래도 안 싸운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걸 자꾸 헐뜯으려 하는가?” 내가 총장으로 있을 때 학교에 걸린 구호를 보고도 “나에 대한 선전은 점젆게 하는 게 좋다. 노골적으로 하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라고 말하고는 했다.
또 내가 주체사상의 뿌리 문제를 제기하면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사상을 계승한 것처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김정일이 권력을 잡고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신격화를 다지자, 김일성의 마음도 달라졌다.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를 호화롭게 꾸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명절 때마다 간부들에게 자기 조상의 묘를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김일성은 빨치산 투쟁경력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했으며, 해방 전에 이미 소련의 저명한 원수나 장군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해방 전의 김일성은 대위였는데, 그가 어떻게 원수나 장군들과 접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계에 대해서도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일도 실속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혹은 선전하기 위해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경제건설에서 허풍이 심했는데, 가능성이 희박한 목표를 세워놓고 외국손님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대학도 내실 있게 운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학 숫자만 늘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해방 전에는 대학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몇 개로 늘어났냐면서 자랑하는 것이었다. 신격화 수준이 높아갈수록 김일성의 자화자찬 수준도 높아졌다. 전에는 후처인 김성애가 대학에 따라 나와 김일성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 들었는데, 나중에는 김성애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 달라졌다.
1974년 2월 19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체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라는 것을 정식화했다. 물론 그 속에 철학적인 내용은 없었다. 김정일이 이 글을 발표한 목적은 아마도 김일성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데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레닌도 ‘스탈린주의’ 나 ‘마오쩌둥주의‘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자신의 교유한 철학체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독창적인 사상체계라고 볼 수 있지만,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등은 정치적인 전략전술 면에서만 자기 견해를 내놓았지 철학적인 원리 면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레닌은 10월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함께 이론을 처음으로 실천한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으나, 스탈린은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명예를 지닐 권리가 없다.
그런데 김일성이 역사발전에 무엇을 기여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김일성주의’를 제창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아직 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때였다.
이전의 그는 달랐다. 누가 그의 항일투쟁을 폄하하면 솔직하게 받아쳤다. “우리는 일제와 조금밖에 못 싸웠지만 그래도 안 싸운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걸 자꾸 헐뜯으려 하는가?” 내가 총장으로 있을 때 학교에 걸린 구호를 보고도 “나에 대한 선전은 점젆게 하는 게 좋다. 노골적으로 하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라고 말하고는 했다.
또 내가 주체사상의 뿌리 문제를 제기하면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사상을 계승한 것처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김정일이 권력을 잡고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신격화를 다지자, 김일성의 마음도 달라졌다.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를 호화롭게 꾸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명절 때마다 간부들에게 자기 조상의 묘를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김일성은 빨치산 투쟁경력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했으며, 해방 전에 이미 소련의 저명한 원수나 장군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해방 전의 김일성은 대위였는데, 그가 어떻게 원수나 장군들과 접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계에 대해서도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일도 실속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혹은 선전하기 위해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경제건설에서 허풍이 심했는데, 가능성이 희박한 목표를 세워놓고 외국손님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대학도 내실 있게 운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학 숫자만 늘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해방 전에는 대학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몇 개로 늘어났냐면서 자랑하는 것이었다. 신격화 수준이 높아갈수록 김일성의 자화자찬 수준도 높아졌다. 전에는 후처인 김성애가 대학에 따라 나와 김일성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 들었는데, 나중에는 김성애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 달라졌다.
1974년 2월 19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체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라는 것을 정식화했다. 물론 그 속에 철학적인 내용은 없었다. 김정일이 이 글을 발표한 목적은 아마도 김일성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데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레닌도 ‘스탈린주의’ 나 ‘마오쩌둥주의‘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자신의 교유한 철학체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독창적인 사상체계라고 볼 수 있지만,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등은 정치적인 전략전술 면에서만 자기 견해를 내놓았지 철학적인 원리 면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레닌은 10월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함께 이론을 처음으로 실천한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으나, 스탈린은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명예를 지닐 권리가 없다.
그런데 김일성이 역사발전에 무엇을 기여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김일성주의’를 제창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아직 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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