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42회]
- 관리자
- 2010-06-04 1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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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남한의 실정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채, 또 당국의 눈을 피해가면서 서둘러 쓴 글인 만큼 표현상의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글에서 밝힌 우리의 통일전략의 기본사상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판단이 복잡하게 엇갈릴 때마다 양심이 요구하는 길을 택해왔고, 결국에는 늘 그런 결정이 옳은 것으로 판명났다. 그러나 이번만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정말 자신이 없었다.
우리의 태도에서 무엇인가를 감지했는지, 하루는 덕홍의 부인이 아들 경모를 찾아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덕홍의 부인은 경리에 밝은 똑똑한 여성이었다. “외화벌이는 교화벌이(외화벌이를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교화소로 간다는 뜻)라고 하는데, 제발 남편을 재단사업에서 풀어주도록 아버지께 말해줘요.” “덕홍 삼촌이 아버지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제 아버지가 덕홍 삼촌의 말을 듣습니다.”
두 사람은 나와 덕홍이 외화벌이를 하며 남한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몹시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덕홍에게 부인이나 경모한테도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덕홍은 내 마음이 약해질까봐 만날 때마다 나를 격려해주었고 , 나는 나대로 덕홍이 동요할까 걱정이 만날 때마다 쪽지를 써주었다. 떠나오던 해, 그러니까 96년 늦가을에 맏딸 선이가 집에 포도를 따러 왔다. 선이는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생각이 깊었다.
“아버지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으세요?” “아무래도 내가 죽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일이있으세요?” 나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랬더니 선이는 돌아앉아 흐느껴 울었다. 나는 딸에게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아버지를 믿을 게 아니라 이제부터는 너 자신을 믿어야 한다.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무엇에 쓰겠니?” 이 말은 내 자신에 대한 충고이기도 했다. 나는 첫 망명지를 주체사상 국제토론회가 열리는 일본으로 정하고, 1997년 1월 31일부터 2월 11일까지 비교적 긴 체류일정을 잡았다.
나는 토오쿄오뿐만 아니라 쿄오토, 나가노까지 방문하여 지기들과 만났다. 조총련 간부들은 나를 성의껏 환대해주었다. 또 조총련의 젊은이들이 주체사상의 진리를 배운다면서 큰 환상을 품고 찾아와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는 했다. 나도 의도적으로 조선대학을 방문하여 주체철학의 일단을 해설하는 강연을 했다. 이처럼 훌륭한 벗들을 속이고 있자니 마음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주체사상의 벗인 오가미 켄이찌와 그의 조직원들이 한결같이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주는데도 나는 그들을 계속 속이고 있어야만 했다.
쿄오토의 많은 벗들과 뜻깊은 상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가노에 가서는 병중에 있는 오랜 벗을 만나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그에게도 심정을 터놓지 못하는 내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의 눈물이었다. 나는 주체사상을 인연으로 하여 세키 히로하루 교수나 카마쿠라 타카오 교수와 친하게 지냈지만, 그래도 마치 형제처럼 스스럼없이 지낸 것은 이노우에 슈우하찌 교수였다. 그는 예전처럼 후두염에 효과가 있는 약과 내가 좋아하는 영양갱을 한 보따리나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자책에 머물며 토론회 일정에 참가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여관에서 함께 숙식하며 참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한사코 권했다.
나는 만일 일본에서 망명이 가능할 경우에 그에게만은 모든 것을 다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너무 정직하고 또 술에 취하면 자기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해버리는 성미라서, 그렇게 믿고 사랑하면서도 나의 진심을 다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진심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런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서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순간, 나의 안타까움은 정말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주체사상의 진리를 기초로 맺어진 우정인데, 진리로 믿어온 것이 허위라는 걸 깨닫는 순간에 그가 맛볼 실망감과 배신감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죽기 전에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줄 곧 신봉해온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덕홍과 함께 1997년 2월 12일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총영사부 건물을 찾아가는 것으로써 북한통치자들과 얽히고설킨 곡절 많은 지난 인생과 결별하고, 작은 나를 죽이고 큰 나를 살리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날은 내가 평양의 집을 떠나오면서 아내에게 귀가를 약속한 바로 그날이었다. 영이별은 한번 실컷 울고 나면 그만이지만, 생이별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계속 남아 가슴을 찌른다. 오냐, 사정없이 더 아프게 찌르라. 아픈 마음을 힘으로 바뀌어 가족들과 겨레 앞에 지은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씻고 죽을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에서 무엇인가를 감지했는지, 하루는 덕홍의 부인이 아들 경모를 찾아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덕홍의 부인은 경리에 밝은 똑똑한 여성이었다. “외화벌이는 교화벌이(외화벌이를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교화소로 간다는 뜻)라고 하는데, 제발 남편을 재단사업에서 풀어주도록 아버지께 말해줘요.” “덕홍 삼촌이 아버지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제 아버지가 덕홍 삼촌의 말을 듣습니다.”
두 사람은 나와 덕홍이 외화벌이를 하며 남한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몹시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덕홍에게 부인이나 경모한테도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덕홍은 내 마음이 약해질까봐 만날 때마다 나를 격려해주었고 , 나는 나대로 덕홍이 동요할까 걱정이 만날 때마다 쪽지를 써주었다. 떠나오던 해, 그러니까 96년 늦가을에 맏딸 선이가 집에 포도를 따러 왔다. 선이는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생각이 깊었다.
“아버지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으세요?” “아무래도 내가 죽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일이있으세요?” 나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랬더니 선이는 돌아앉아 흐느껴 울었다. 나는 딸에게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아버지를 믿을 게 아니라 이제부터는 너 자신을 믿어야 한다.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무엇에 쓰겠니?” 이 말은 내 자신에 대한 충고이기도 했다. 나는 첫 망명지를 주체사상 국제토론회가 열리는 일본으로 정하고, 1997년 1월 31일부터 2월 11일까지 비교적 긴 체류일정을 잡았다.
나는 토오쿄오뿐만 아니라 쿄오토, 나가노까지 방문하여 지기들과 만났다. 조총련 간부들은 나를 성의껏 환대해주었다. 또 조총련의 젊은이들이 주체사상의 진리를 배운다면서 큰 환상을 품고 찾아와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는 했다. 나도 의도적으로 조선대학을 방문하여 주체철학의 일단을 해설하는 강연을 했다. 이처럼 훌륭한 벗들을 속이고 있자니 마음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주체사상의 벗인 오가미 켄이찌와 그의 조직원들이 한결같이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주는데도 나는 그들을 계속 속이고 있어야만 했다.
쿄오토의 많은 벗들과 뜻깊은 상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가노에 가서는 병중에 있는 오랜 벗을 만나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그에게도 심정을 터놓지 못하는 내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의 눈물이었다. 나는 주체사상을 인연으로 하여 세키 히로하루 교수나 카마쿠라 타카오 교수와 친하게 지냈지만, 그래도 마치 형제처럼 스스럼없이 지낸 것은 이노우에 슈우하찌 교수였다. 그는 예전처럼 후두염에 효과가 있는 약과 내가 좋아하는 영양갱을 한 보따리나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자책에 머물며 토론회 일정에 참가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여관에서 함께 숙식하며 참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한사코 권했다.
나는 만일 일본에서 망명이 가능할 경우에 그에게만은 모든 것을 다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너무 정직하고 또 술에 취하면 자기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해버리는 성미라서, 그렇게 믿고 사랑하면서도 나의 진심을 다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진심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런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서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순간, 나의 안타까움은 정말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주체사상의 진리를 기초로 맺어진 우정인데, 진리로 믿어온 것이 허위라는 걸 깨닫는 순간에 그가 맛볼 실망감과 배신감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죽기 전에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줄 곧 신봉해온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덕홍과 함께 1997년 2월 12일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총영사부 건물을 찾아가는 것으로써 북한통치자들과 얽히고설킨 곡절 많은 지난 인생과 결별하고, 작은 나를 죽이고 큰 나를 살리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날은 내가 평양의 집을 떠나오면서 아내에게 귀가를 약속한 바로 그날이었다. 영이별은 한번 실컷 울고 나면 그만이지만, 생이별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계속 남아 가슴을 찌른다. 오냐, 사정없이 더 아프게 찌르라. 아픈 마음을 힘으로 바뀌어 가족들과 겨레 앞에 지은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씻고 죽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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