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37회]
  • 관리자
  • 2010-06-04 11: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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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난이 심해지면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어 갔다. 평양의 경우도 중심가만 조금 벗어나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배낭을 멘 채 식량을 구하러 나서는 바람에, 교외의 장마당으로 가는 길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산기슭에서는 사람들이 풀을 뜯느라 기어 다니고 있었으며, 물이 고여 있는 곳은 조개나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평양은 그래도 지방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지방출장을 다녀온 일꾼들의 보고에 의하면, 기차역마다 굶어죽어 가는 아이들이 우글거리고 해변가에는 조개잡이가 너무 지나쳐 인근바다에는 조개씨가 말라 멀리까지 나갔다가 미처 밀물을 피하지 못해 수백 명이 단번에 희생된 일도 있었다고 했다.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먹여살릴 수 없어지자, 그저 얻어먹기라도 하라고 밖으로 내보내는 집이 속출했다. 이 얘기는 내 셋째 딸이 들려준 것인데, 어느 날 아침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어린 학생 두 명이 새까만 손을 내밀려 밥 좀 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우선 손부터 씻게 하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 아버지가 다 굶어 누워 우리만이라도 나가 얻어먹으라고 해서 남포에서 걸어왔어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딸한테 그 말을 듣고는 김덕홍에게 아사자들의 통계를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조직부 일꾼을 마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라고 했다. “조직부 일꾼의 말에 의하면 지난 95년에는 당원 5만 명을 포함해서 50만 명이 굶어죽었고, 올해(그때는 11월 중순이었다)에는 벌써 100만 명가량이 굶어죽어 간다고 합니다.”

김덕홍은 이 말을 하면서 김정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이를 갈았다. 군수공업담당비서의 말도 그와 비슷했다. 군수공장노동자가 약 50만 명인데, 그들 중에 기술수준이 가장 높아 보배라고 귀중히 여기던 기술공만 해도 2천 명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너무도 굶주려 직장에도 나가지 못한 채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통치자들은 이 같은 상황이 그저 자연재해 탓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자연재해라면 왜 공업까지 전면적인 마비상태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전대미문의 민생고는 바로 수령절대주의의 산물이며 김정일의 개인독재가 나라살림을 이 지경으로 망쳐놓은 것이었다. 인민들이 무더기로 굶어죽는 참상을 목도하면서, 나는 수령절대주의란 한날 수령의 철저한 이기주의라는 것을 더욱 절실히 체험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정일은 주민들이 굶어죽고 추위에 떨고 있는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일성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궁전을 꾸미는 데만 막대한 자금과 자재를 탕진했다.

더구나 나날이 심해지는 고통과 피로로 기진맥진해진 주민들을 김부자를 우상화하기 위한 건설현장으로 계속 내몰았다. 대강 추산해 봐도 궁전을 꾸미는 데 쓴 돈의 3분의 1만 절약해도 200만 톤의 옥수수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 정도 식량이면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는 당장에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얼마나 인민생활에 무관심했는지는 96년 여름에 벌인 초지조성 소동이 잘 말해준다. 그 무렵 스위스 주재대사 (스위스 대사는 김정일이 직접 자기심복을 배치해왔다)가 스위스는 소나 양에게 사료를 먹이지 않고 풀만 먹여 기른다면서 이 경험을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김정일은 비서들에게 스위스 대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지시했다. 나는 그처럼 웃기는 짓거리를 보인 스위스 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김정일의 지시를 현명한 가르침이라고 떠드는 비서들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작물을 심을 땅이 있으면 인민을 총동원하여 강냉이 한 포기라도 더 심을 생각은 못할지언정, 주민들에게 육고기를 먹인다며 초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전군중적인 운동으로 전개하라고 떠드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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