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홍은 재단 사업을 하며 해외에 나가 여러 지역의 교포들을 만나고 남한의 기업가들도 접촉하는 과정에서 더욱 더 내 사상의 정당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적 발전은 나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1994년에도 식량이 모자라 인민들이 굶주렸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었다는 소문은 없었다. 그러나 95년에 들어서자 사정은 급속도로 달라졌다. 평안북도 지방에 수재가 난 이후로 식량난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도처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날만 새면 무더기로 나왔으며, 식량을 구하기 위한 살인강도 역시 부쩍 늘어났다. 오죽하면 당 간부들이 밤중에 산길을 가다가 군인들에게 제지당해 차량이 파손되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약탈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겠는가. 그런 소식을 들은 김덕홍은 해외에서 힘이 닿는 데까지 밀가루를 사서 보내기 시작했다. 그 양이 어떤 때는 100톤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밀가루를 우선 주체과학원 연구원들에게 나누어주고 보위부에도 풀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요일이어서 집에 들어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점심을 챙겨가려고 주방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아침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아내는 곧잘 그렇게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무심결에 밥상을 봤더니 반찬이 된장찌개 한 가지였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아내의 점심밥곽(도시락)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밥이 반쯤 담겨 있고 반찬 그릇에는 짠지만 몇 조각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내가 직장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손주들 수발하고 채소밭도 가꾸는 등 바삐 일하는 것을 알고 있어, 순간 역정을 냈다. “왜 이렇게 밥을 조금 싸가지고 나가? 이렇게 먹고 어떻게 일을 한단 말이오?” “아이고, 그런 말 마세요. 이것도 가져가면 혼자 먹기가 죄스러워요. 모두 다 풀만 싸가지고 오는 걸요.”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도 말았는가 ··· 아내의 말이 이어졌다. “주체과학원 사람들은 걱정 없이 산다는 소문이 있어요. 밀가루를 우리 직장 쪽에 좀 나눠주면 안 되나요?” “그렇게 하지. 우선 한 사람 당 20킬로씩 주겠어. 하지만 거저 줄 수는 없어.” “출판사에 녹음 카세트를 수천 개 갖고 있으니까 바꾸는 방법을 찾아봐 주세요.” 그렇게 하여 나는 밀가루와 카세트를 맞바꾸었다. 아내의 직장에서는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때나마 아내의 직장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했지만, 수많은 인민들을 구할 길은 참으로 막막했다. 이래서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사태가 이러한데도 김정일은 인민들의 식량난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직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궁전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자신의 우상화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었다.
나는 허탈하다 못해 차츰 분노가 치밀었다. 1995년 2월, 김정일의 생일을 경축하는 주체사상 국제토론회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개최했다. 나는 코펜하겐을 오가던 길에 모스크바에 들러 러시아 당 대표들과 학자대표들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주체철학의 일반적 원칙을 선전하는 방향에서 그 국제토론회를 끌고가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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