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25회]
- 관리자
- 2010-06-04 11: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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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다치고 얼마 있지 않아 오래도록 절교상태에 있던 김경희가 내 아내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내용은 오빠 때문에 속이 상한다는 것이었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김정일이 낙마 후유증으로 죽게 되면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김정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나타나지 못할 만큼 심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1994년이 되자 김일성은 겉으로는 괜찮았지만 우리와 만나 얘기를 할 때면 방귀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몇 년 전부터 듣는 게 시원찮았지만, 그즈음에는 귀가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5월에 눈 수술을 받았는데, 비밀로 하여 어떤 수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방북하는 바람에 피로는 더욱 누적되었다. 카터와 회담하던 자리에서 김일성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는 카터의 호감을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카터의 방문과 관련한 업무는 외교부에서 독점했기 때문에, 나와 김용순은 김일성이 차린 오찬에 한 차례 참가했을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한편 남북정상회담이 1994년 7월 25일로 결정되면서 김일성은 더욱 들뜨게 되었다. 그가 외국손님을 접견하는 자리에 동석해서보면, 김일성은 흥분하여 조국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마치 남한인민들이 김일성을 떠받들고 있다는 투로 김정일이 허위보고를 한 탓에 김일성으로서도 자기 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는 쿠바의 하바나 공항에서 들었다. 나는 사망소식을 듣고 그날로 출발했는데, 평양에 도착하니 7월 13일이었다. 아내는 마치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더 슬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김일성의 사망을 의사들의 잘못 탓으로 돌리면서 죽일 놈들이라고 욕을 해대었다. 나는 원래 기뻐서 눈물은 흘려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적었다. 왜냐하면 슬퍼서 눈물을 쏟는 것을 일종이 감상주의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이 다 울고 있는데 나 혼자 멀쩡한 눈으로 있다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들은 장례식에 참석한 내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고는 내가 적게 운다고 나무랐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김일성은 내 입장에서 보면 분명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잘해주었고, 또 한편으로는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식 정치를 더욱 개악함으로써 사회발전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의 죽음을 마음속 깊이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개인숭배로 사람들이 자주의식을 극도로 마비시켜 전인민이 땅을 치며 울도록 만든 그의 행적이 더욱 미워지는 것이었다. 북한주민을 자주의식이 없는 꼭두각시로 만든 걸 생각하면 눈물은커녕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7월 20일 오전 김일성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있는데 김정일에게서 전화가 왔다. “황 비서, 이제 새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새 시대에 맞게 일을 잘해나갑시다.” 나는 조금 의아해했다. 그에게는 나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데도 굳이 나에게 그런 전화를 먼저 걸었는지 알 길이 없었던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듣는 게 시원찮았지만, 그즈음에는 귀가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5월에 눈 수술을 받았는데, 비밀로 하여 어떤 수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방북하는 바람에 피로는 더욱 누적되었다. 카터와 회담하던 자리에서 김일성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는 카터의 호감을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카터의 방문과 관련한 업무는 외교부에서 독점했기 때문에, 나와 김용순은 김일성이 차린 오찬에 한 차례 참가했을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한편 남북정상회담이 1994년 7월 25일로 결정되면서 김일성은 더욱 들뜨게 되었다. 그가 외국손님을 접견하는 자리에 동석해서보면, 김일성은 흥분하여 조국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마치 남한인민들이 김일성을 떠받들고 있다는 투로 김정일이 허위보고를 한 탓에 김일성으로서도 자기 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는 쿠바의 하바나 공항에서 들었다. 나는 사망소식을 듣고 그날로 출발했는데, 평양에 도착하니 7월 13일이었다. 아내는 마치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더 슬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김일성의 사망을 의사들의 잘못 탓으로 돌리면서 죽일 놈들이라고 욕을 해대었다. 나는 원래 기뻐서 눈물은 흘려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적었다. 왜냐하면 슬퍼서 눈물을 쏟는 것을 일종이 감상주의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이 다 울고 있는데 나 혼자 멀쩡한 눈으로 있다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들은 장례식에 참석한 내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고는 내가 적게 운다고 나무랐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김일성은 내 입장에서 보면 분명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잘해주었고, 또 한편으로는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식 정치를 더욱 개악함으로써 사회발전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의 죽음을 마음속 깊이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개인숭배로 사람들이 자주의식을 극도로 마비시켜 전인민이 땅을 치며 울도록 만든 그의 행적이 더욱 미워지는 것이었다. 북한주민을 자주의식이 없는 꼭두각시로 만든 걸 생각하면 눈물은커녕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7월 20일 오전 김일성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있는데 김정일에게서 전화가 왔다. “황 비서, 이제 새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새 시대에 맞게 일을 잘해나갑시다.” 나는 조금 의아해했다. 그에게는 나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데도 굳이 나에게 그런 전화를 먼저 걸었는지 알 길이 없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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