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23회]
- 관리자
- 2010-06-04 1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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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온 후의 내 생활은 초대소에 있을 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집에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오랜 습관으로 와이셔츠나 양말 등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내가 직접 빨았고, 자잘한 바느질도 했다. 아내는 나에게 궁상을 떤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그것도 건강에 필요한 하나의 운동이라며 둘러대어 겨우 납득 시켰다. 나는 아침식사는 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었고, 점심은 운전기사를 시켜 집에서 날라다 먹었으며, 저녁에는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하고는 다시 나왔다.
이 무렵 나는 손녀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나가려다가도 지현이가 안 보이면 왠지 쓸쓸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고사리 손으로 배웅을 받기라도 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졌다. 일요일이면 외손자와 외손녀들이 모여 들였다. 그 애들이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들어 과자나 사탕을 달라고 조를 때의 행복감이란····. 그래서 외국출장에서 돌아올 때는 되도록이면 사탕이나 과자를 많이 사서 사무실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일요일에 가지고 들어가 나눠주곤 했다.
나는 손녀를 탁아소에 보내 다른 애들과 어울리게 하면서 단련시켰다. 아들과 며느리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꼭 탁아소에 보내도록 엄격하게 지시했다. 국제비서의 손녀라면 다른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 탁아소에 보낼 것을 굳이 고집했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서면 지현이가 쑥 나서면서 “할아버지, 나 오늘 탁아소 갔다 왔어.”하며 귀엽게 맞았다. 어떤 날은 탁아소에서 애들과 놀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그 애의 심정을 알고 싶어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왜 피가 났네?” 그러면 지현이는 울먹이면서 “아 새끼가 그렇게 했어.”하는 것이었다. 지현이가 세 살 때의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가는데 여느 날처럼 지현이가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아이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나는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었다. “우리 지현이 오늘 탁아소에 안 갔다왔지?”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안고 있던 애를 내려놓으면서 조금 쌀쌀하게 말했다. “지현이가 탁아소에 갔다오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이제 같이 놀지 않겠다.” 그러자 지현이가 나를 꼬집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항의했다. “할아버지 미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현이는 나를 자꾸 밀치며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내쪽에서는 일부러 대꾸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몇 차례 할애비를 움직여보려고 칭얼거리며 화해를 시도해보던 아이는 그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른 방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나오려는데 현관문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지현이가 벽을 향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이것은 나에 대한 손녀의 항의였다. 나는 아내를 불러 애를 데려가도록 했다. 나는 저녁 여덟시가 되면 서기에게 퇴근하라고 하고는 서재에서 혼자 일을 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날도 서기를 퇴근시키고 방으로 들어와 자려고 누웠다. 머리맡에는 여러 대의 전하기가 있었지만, 나는 김정일한테서 오는 직통전화만 받기로 했다.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눈앞에는 지현이가 차가운 복도에 누워 몸으로 항의하던 모습이 떠올라 잠이 점점 멀어졌다. 세 살 난(북한은 만으로 나이를 센다)아이도 자주성이 있는데 하물며 성인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개인우상화 독재체제에서는 사람의 자주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에 전화를 걸어 지현이를 바꾸라고 했다. 아이는 마치 내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밝은 목소리로 받았다. 나는 앞으로 탁아소를 빠지지 말고 나가라는 것과, 너를 사랑한다는 말 등을 해주었다. “할아버지, 이제 탁아소 빠지지 않을게요.” “그래, 할아버지도 지현이를 하늘만큼 사랑한단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지금도 손녀 지현이가 가장 보고 싶다. 아아, 살아서 다시 그 아이를 볼 수 있을까.
이 무렵 나는 손녀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나가려다가도 지현이가 안 보이면 왠지 쓸쓸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고사리 손으로 배웅을 받기라도 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졌다. 일요일이면 외손자와 외손녀들이 모여 들였다. 그 애들이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들어 과자나 사탕을 달라고 조를 때의 행복감이란····. 그래서 외국출장에서 돌아올 때는 되도록이면 사탕이나 과자를 많이 사서 사무실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일요일에 가지고 들어가 나눠주곤 했다.
나는 손녀를 탁아소에 보내 다른 애들과 어울리게 하면서 단련시켰다. 아들과 며느리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꼭 탁아소에 보내도록 엄격하게 지시했다. 국제비서의 손녀라면 다른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 탁아소에 보낼 것을 굳이 고집했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서면 지현이가 쑥 나서면서 “할아버지, 나 오늘 탁아소 갔다 왔어.”하며 귀엽게 맞았다. 어떤 날은 탁아소에서 애들과 놀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그 애의 심정을 알고 싶어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왜 피가 났네?” 그러면 지현이는 울먹이면서 “아 새끼가 그렇게 했어.”하는 것이었다. 지현이가 세 살 때의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가는데 여느 날처럼 지현이가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아이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나는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었다. “우리 지현이 오늘 탁아소에 안 갔다왔지?”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안고 있던 애를 내려놓으면서 조금 쌀쌀하게 말했다. “지현이가 탁아소에 갔다오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이제 같이 놀지 않겠다.” 그러자 지현이가 나를 꼬집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항의했다. “할아버지 미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현이는 나를 자꾸 밀치며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내쪽에서는 일부러 대꾸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몇 차례 할애비를 움직여보려고 칭얼거리며 화해를 시도해보던 아이는 그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른 방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나오려는데 현관문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지현이가 벽을 향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이것은 나에 대한 손녀의 항의였다. 나는 아내를 불러 애를 데려가도록 했다. 나는 저녁 여덟시가 되면 서기에게 퇴근하라고 하고는 서재에서 혼자 일을 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날도 서기를 퇴근시키고 방으로 들어와 자려고 누웠다. 머리맡에는 여러 대의 전하기가 있었지만, 나는 김정일한테서 오는 직통전화만 받기로 했다.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눈앞에는 지현이가 차가운 복도에 누워 몸으로 항의하던 모습이 떠올라 잠이 점점 멀어졌다. 세 살 난(북한은 만으로 나이를 센다)아이도 자주성이 있는데 하물며 성인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개인우상화 독재체제에서는 사람의 자주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에 전화를 걸어 지현이를 바꾸라고 했다. 아이는 마치 내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밝은 목소리로 받았다. 나는 앞으로 탁아소를 빠지지 말고 나가라는 것과, 너를 사랑한다는 말 등을 해주었다. “할아버지, 이제 탁아소 빠지지 않을게요.” “그래, 할아버지도 지현이를 하늘만큼 사랑한단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지금도 손녀 지현이가 가장 보고 싶다. 아아, 살아서 다시 그 아이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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