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실을 보았다 [제121회]
- 관리자
- 2010-06-04 11:12:21
- 조회수 : 1,719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저는 목이 나빠서 수령님을 모시기 곤란합니다.” 그러자 김정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목이 쉬면 수령님 귀에 가까이 대고 크게 말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제부가 이제는 외교부를 지도·통제하지 않고 세계 각국 당들과의 교류만을 사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당들과의 사업이 곧 사상이론 사업이기 때문에 사상이론 전문가가 비서를 맡는 게 옳고, 따라서 주체사상연구소를 국제부에 합병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당시 국제비서로 있던 허담이 건강악화와 인해 비서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담은 형식상 최고인민회의의 대외사업을 맡고 있었으나, 신병 치료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김용순이 통일전선담당비서로 간 뒤로 기존에 과학교육비서로 있던 최태복이 1년 동안 국제비서를 맡았는데, 최가 주체사상을 몰라 국제비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용순이 통일전선비서로 가면서 김경희도 경공업부장으로 옮겨가, 나로서는 경모의 혼인문제 이후로 멀어진 김경희와 업무상 마주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내가 국제비서를 맡는다고 해도 김경희를 직접 상대할 일은 드물었다. 김일성 부자로부터 마음은 자꾸 멀어져 갔으나, 북한을 살려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김정일은 경제사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전쟁준비에 더욱 힘을 쏟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이른바 고자세 외교정책을 견지했다. 그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러시아가 수정주의를 표방하다가 망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더구나 중국과 베트남까지 비방함으로써 그들 나라와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고 왕래가 잦아지면서 김정일의 신경질은 극에 달했다. 심지어 조선노동당 대표단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베트남 당대표들과 만나도 악수조차 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베트남에 나날이 투자를 확대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도 비쳤듯이 북한의 대외정책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아 보려고 국제비서를 수락했다. 물론 북에서는 김정일의 제의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국제부로 돌아오자마자 국제정세의 분석을 기초로 해서 당 외교의 기본방향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특히 중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가까운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들어 있었다. 김정일은 나의 제의를 지지해주었다. 김정일의 비준을 받은 나는 중국의 광저우와 주하이 같은 개방지역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성과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장쩌민 주석과도 두 번째로 만나 뜻깊은 담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그가 중국과 같은 대국을 능히 이끌어나갈 수 있는 큰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중국에 대한 김정일의 질투심에 영합한 외교부 간부들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간다느니 민족이기주의로 나간다느니 하면서 대만과의 교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만 주패장’이라고 하면서 대만과의 연계를 중국을 견제하는 무기로 활용하려 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당시 국제비서로 있던 허담이 건강악화와 인해 비서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담은 형식상 최고인민회의의 대외사업을 맡고 있었으나, 신병 치료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김용순이 통일전선담당비서로 간 뒤로 기존에 과학교육비서로 있던 최태복이 1년 동안 국제비서를 맡았는데, 최가 주체사상을 몰라 국제비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용순이 통일전선비서로 가면서 김경희도 경공업부장으로 옮겨가, 나로서는 경모의 혼인문제 이후로 멀어진 김경희와 업무상 마주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내가 국제비서를 맡는다고 해도 김경희를 직접 상대할 일은 드물었다. 김일성 부자로부터 마음은 자꾸 멀어져 갔으나, 북한을 살려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김정일은 경제사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전쟁준비에 더욱 힘을 쏟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이른바 고자세 외교정책을 견지했다. 그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러시아가 수정주의를 표방하다가 망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더구나 중국과 베트남까지 비방함으로써 그들 나라와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고 왕래가 잦아지면서 김정일의 신경질은 극에 달했다. 심지어 조선노동당 대표단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베트남 당대표들과 만나도 악수조차 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베트남에 나날이 투자를 확대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도 비쳤듯이 북한의 대외정책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아 보려고 국제비서를 수락했다. 물론 북에서는 김정일의 제의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국제부로 돌아오자마자 국제정세의 분석을 기초로 해서 당 외교의 기본방향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특히 중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가까운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들어 있었다. 김정일은 나의 제의를 지지해주었다. 김정일의 비준을 받은 나는 중국의 광저우와 주하이 같은 개방지역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성과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장쩌민 주석과도 두 번째로 만나 뜻깊은 담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그가 중국과 같은 대국을 능히 이끌어나갈 수 있는 큰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중국에 대한 김정일의 질투심에 영합한 외교부 간부들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간다느니 민족이기주의로 나간다느니 하면서 대만과의 교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만 주패장’이라고 하면서 대만과의 연계를 중국을 견제하는 무기로 활용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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