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라’라는 이름으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김경희가 내게 준 소련판 지도책에도 ‘유라’라고 씌어 있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사실을 속이면서 백두산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김정일이 태어나 백두산의 밀영을 찾아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백두산 일대를 뒤졌지만 애초원 없던 밀영지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찾아야겠다며 돌아다니다가 경치도 적당하고 위치도 그럴듯한 곳을 지적해주었다. 그리고 그곳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명명했다. 당 역사연구소는 구호나무도 준비하고 큰 바위에다 ‘정일봉’이라고 써서 산정상에 올려붙였다. 그리고 예술인들은 ‘정일봉’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칭송하는 시를 써서 돌렸던 것이다. 나는 남부끄럽고 한편으로 김일성이 애처롭기도 하여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일성은 지난 1992년 무렵에 이른바 회고록을 집필하는 데 큰 기대를 걸었다. 나는 형식상으로나마 당 역사연구소를 담당하는 비서로서 속으로 제발 한두 권만 내고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의 얘기지만, 그 일로 한몫 보려는 사람들은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내자고 주장하며 나섰다. 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며 반대했다.
처음에는 김정일도 내 말을 듣는 것 같았으나 회고록 속편이 만들어지자 아주 흡족해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도 역사는 반드시 진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토록 뻔한 이치를 어째서 그렇게도 모르는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찮은 경력도 속이는 자들이 어떻게 인민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일성 부자는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몰랐으며, 오직 이기주의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속물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찮은 경력도 속이는 자들이 어떻게 인민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일성 부자는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몰랐으며, 오직 이기주의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속물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1992년의 그 추태를 보면서 내 마음은 김일성 부자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쓸데없는 것에 시간과 정열을 허비하기보다는 두 가지만을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하나는 시간을 쪼개어 어떻게든 내가 개척한 인간중심의 사상을 정리해서 후대들에게 남겨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사상 국제세미나를 이용하여 주체철학을 좀더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작정한 나는 예전보다 주체과학원에 더 자주 나가 학자들과 이론토론회를 열었다. 왜냐하면 김정일이 내가 김일성 부자의 글을 쓰면서 강연을 하고 다니면 자신들 명의로 글이 발표되기도 전에 새 사상이 세상에 나간다는 이유로 이론강연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토론회는 막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주체과학원에서 토론회를 열도록 하고는 토론회에 참가해 발언하는 형식을 취했다. 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토론제목은 늘 김정일의 노작들 중에서 정하여 ‘김정일 노작 토론회’ 형식을 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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