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12회]
- 관리자
- 2010-06-04 11:09:13
- 조회수 : 1,659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자들의 가소로운 책동은 그런 흐름을 읽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김정일은 어느 날 초대소에 있던 나에게 (봉투에 내 이름을 친필로 쓴)극비문서를 보내주었다. 봉투 안에는 내가 수령관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글을 누가 썼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그 같은 자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는데, 김정일은 그 글을 읽고 서명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문서는 법적인 문서였다.
며칠 후 김정일과 통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도대체 주체사상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유치한 놈들이 함부로 이따위 글을 써서 지도자 동지께 올리다니, 정말 무엄하기 짝이 없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더니 김정일이 크게 웃고 말았다. 원래 김정일의 친필서명이 된 문건은 영구보존 문건으로서 국고에 보관하도록 총무부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서는 내가 계속 가지고 있다가 망명을 하면서 금고 안에 두고 왔다.
소동이 가라앉자, 나는 의암초대소에서 원고 집필을 지도하면서 시간을 내어 외국의 출판물들을 읽었다. 나는 지도사상 이론담당비서로서 외국서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내 서고에는 외국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특히 미국의 학자들이 쓴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초대소에서는 새벽 4~5시에 기상해서 낮 12시까지 일을 계속하여 일단 하루 작업량을 끝냈다. 나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점심시간까지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하는 시간이 젊은이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침을 약간 한 후에는 주로 가벼운 일을 했다. 대체로 주체과학원에 나가 외국에서 온 학자를 만나거나 과학원 학자들과 개별담화에 임했다. 나는 글을 매끄럽고 논리적으로 잘 다듬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쓸 일이 생기면 내가 일단 기본사상을 얘기해 주고 아래에서 초안을 만들도록 했다. 초안이 만들어지면 모두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쳐나가게 하든가, 시간이 없을 때는 내가 글의 틀을 직접 짜주고 초안을 만들게 하는 방식을 썼다.
독일의 통일도 소련의 붕괴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부자는 그 두 가지의 엄중한 경고를 보면서도 역사에 더욱 역행하는 길로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북한의 장래가 뻔히 내다보여, 내 고민은 갈수록 커졌다. 나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북한의 현실을 뒤집어 선전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내가 보기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중국을 따라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것이었으나 그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도 내심으로는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북한을 방문하고 간 인사들도 그저 많은 것을 배워간다는 투의 의례적인 말만 할 뿐이었다
며칠 후 김정일과 통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도대체 주체사상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유치한 놈들이 함부로 이따위 글을 써서 지도자 동지께 올리다니, 정말 무엄하기 짝이 없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더니 김정일이 크게 웃고 말았다. 원래 김정일의 친필서명이 된 문건은 영구보존 문건으로서 국고에 보관하도록 총무부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서는 내가 계속 가지고 있다가 망명을 하면서 금고 안에 두고 왔다.
소동이 가라앉자, 나는 의암초대소에서 원고 집필을 지도하면서 시간을 내어 외국의 출판물들을 읽었다. 나는 지도사상 이론담당비서로서 외국서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내 서고에는 외국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특히 미국의 학자들이 쓴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초대소에서는 새벽 4~5시에 기상해서 낮 12시까지 일을 계속하여 일단 하루 작업량을 끝냈다. 나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점심시간까지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하는 시간이 젊은이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침을 약간 한 후에는 주로 가벼운 일을 했다. 대체로 주체과학원에 나가 외국에서 온 학자를 만나거나 과학원 학자들과 개별담화에 임했다. 나는 글을 매끄럽고 논리적으로 잘 다듬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쓸 일이 생기면 내가 일단 기본사상을 얘기해 주고 아래에서 초안을 만들도록 했다. 초안이 만들어지면 모두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쳐나가게 하든가, 시간이 없을 때는 내가 글의 틀을 직접 짜주고 초안을 만들게 하는 방식을 썼다.
독일의 통일도 소련의 붕괴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부자는 그 두 가지의 엄중한 경고를 보면서도 역사에 더욱 역행하는 길로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북한의 장래가 뻔히 내다보여, 내 고민은 갈수록 커졌다. 나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북한의 현실을 뒤집어 선전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내가 보기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중국을 따라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것이었으나 그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도 내심으로는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북한을 방문하고 간 인사들도 그저 많은 것을 배워간다는 투의 의례적인 말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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