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08회]
  • 관리자
  • 2010-06-04 11: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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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나를 구해준 것은 김정일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김일성에게 이번 일은 황비서보다도 자기한테 더 잘못이 있다면서 김일성의 노여움을 풀어준 모양이었다. 김정일은 나에게 그 같은 사정을 들려주면서 신년사 집필을 서둘러 도와달라고 했다. 하필이면 그때 문서정리실 실장이 췌장염으로 사망하여, 김일성의 신년사를 쓸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초대소에 나가 1988년도 김일성의 신년사를 집필했다. 김정일과 김일성의 비준이 난 다음날, 김정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황 선생께서 국제비서를 그만두고 문서정리실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김용순을 국제부장으로 등용하고 지금 부장대리로 있는 사람은 노동신문사 주필로 내보겠습니다. 하지만 김용순에게만 국제부를 맡길 수는 없기 때문에,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을 비서로 배치하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든든한 사람이란 바로 허담이었다. 그리하여 허담은 오래도록 희망했던 대로 국제비서가 되고 김용순은 국제부장이 되었으며, 나는 주체사상연구소와 문서정리실 외에 당 역사연구소의 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통일전선부는 윤기복이 부장 겸 비서로 임명되었다.

가족들은 내가 국제비서에서 해임되자 섭섭함을 나타냈으나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고, 무엇보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부대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양 시내의 중앙당 청사로부터 가까우면서도 삼림이 우거지고 경치가 수려한 의암초대소에서 김일성 부자를 위한 집필작업을 지도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서 묵고는 줄곧 초대소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주체사상연구소에도 자주 나갔고, 주체과학원에도 나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 무렵 나의 관심은 개혁·개방이론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잘못을 고치고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도입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이론의 철학적 기초부터 근본적으로 고치고, 개혁·개방의 기본방향을 밝혀주는 이론을 확립하는 데 주된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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