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5회]
- 관리자
- 2010-06-04 11:03:09
- 조회수 : 1,499
추수동원이 끝나고 학생들이 돌아온 다음 두 학급의 경쟁토론을 지도했는데, 추수동원에 나가기 전보다 수준이 월등히 향상되어 있었다. 그처럼 급격한 발전에 놀란 나는 그 원인을 캐보았다.
그랬더니 이 학생들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추수동원에 나가 벼를 베고 나르면서도 자기들끼리 계속 논쟁을 벌인 것이었다. 논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어떤 날은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논쟁을 벌이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학생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논쟁의 분위기만 조성해주면 일을 하면서도 능히 논쟁을 통해 학생들의 사고능력을 중단 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중단한 채 모내기나 김매기, 추수작업 등의 작업동원에 나갈 때마다 나는 학습지도교원을 딸려 보내면서, 아침식사를 할 때 학생들에게 하루 동안 논쟁할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20분 정도 설명해주도록 했다. 학생들은 노동현장에 나가는 도중에도 서로 논쟁을 하고, 모내기나 김매기를 할 때도 서로 조를 짜 논쟁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학습지도교원들을 동원하여,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아무리 육체노동이 바쁜 경우에도 5~8시간 정도의 논쟁시간을 짜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시간은 육체노동에도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당 책임비서와 의견이 대립되어 어느 편이 옳은지를 결정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내 주장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후로 당 책임비서도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학생들의 의견은 일하면서 논쟁을 하게 되면 우선 피로가 덜하고 대학생으로서 학습을 계속한다는 긍지가 높아져, 같이 일하는 농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교육경험을 전국에 걸쳐 일반화 할 것을 건의하고, 전국에 이 경험을 보여줄 시범상학(각급 학교 책임자들이 실제 현장에 와서 보고 배우게 하는 강습)을 조직했다.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은 김일성과 김정일도 적극 지지해주었다.
나는 노력동원과 각종 사회동원으로 학업이 1년에 적어도 8~9차례 중단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하는 정신(고학생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나는 교육분야에서도 과학교육담당비서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김정일은 조직부를 통해 비서들의 활동을 감시하게 하고, 군중의 여론과 반대의견 같은 것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 감시활동 결과를 담당비서와 협의할 것 없이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김정일이 그 보고 자료를 읽고 내려 보내주면, 비서들은 거기에 적혀 있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조직부의 해당 과 직원이 과학원 원장을 좋지 않게 봤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과학원의 당 비서를 통해 과학원 원장이 사업을 제대로 못한다는 반영자료를 과학원의 가장 권위 있는 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꾸며 김정일에게 보고한다. 그럴 경우, 과학원을 담당한 과학교육비서는 과학원원장을 철직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완전히 조직부의 손에 놀아나는 셈이었고, 한편으로 조직부는 점점 더 독재체계를 강화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김정일은 특히 이런 면에서 한심했다. 훗날 조직부 내에서조차 비판이 제기되어 약간 시정되기는 했지만, 내가 새로운 학습방법을 내놓을 때만 해도 조직부의 보고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으며, 조직부가 사실상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논쟁하는 학습방법에 대해 제동을 건 것도 조직부와 연계를 가지고 있던 나의 반대파 세력이었다. 그리하여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제도화하려던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랬더니 이 학생들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추수동원에 나가 벼를 베고 나르면서도 자기들끼리 계속 논쟁을 벌인 것이었다. 논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어떤 날은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논쟁을 벌이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학생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논쟁의 분위기만 조성해주면 일을 하면서도 능히 논쟁을 통해 학생들의 사고능력을 중단 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중단한 채 모내기나 김매기, 추수작업 등의 작업동원에 나갈 때마다 나는 학습지도교원을 딸려 보내면서, 아침식사를 할 때 학생들에게 하루 동안 논쟁할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20분 정도 설명해주도록 했다. 학생들은 노동현장에 나가는 도중에도 서로 논쟁을 하고, 모내기나 김매기를 할 때도 서로 조를 짜 논쟁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학습지도교원들을 동원하여,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아무리 육체노동이 바쁜 경우에도 5~8시간 정도의 논쟁시간을 짜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시간은 육체노동에도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당 책임비서와 의견이 대립되어 어느 편이 옳은지를 결정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내 주장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후로 당 책임비서도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학생들의 의견은 일하면서 논쟁을 하게 되면 우선 피로가 덜하고 대학생으로서 학습을 계속한다는 긍지가 높아져, 같이 일하는 농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교육경험을 전국에 걸쳐 일반화 할 것을 건의하고, 전국에 이 경험을 보여줄 시범상학(각급 학교 책임자들이 실제 현장에 와서 보고 배우게 하는 강습)을 조직했다.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은 김일성과 김정일도 적극 지지해주었다.
나는 노력동원과 각종 사회동원으로 학업이 1년에 적어도 8~9차례 중단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하는 정신(고학생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나는 교육분야에서도 과학교육담당비서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김정일은 조직부를 통해 비서들의 활동을 감시하게 하고, 군중의 여론과 반대의견 같은 것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 감시활동 결과를 담당비서와 협의할 것 없이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김정일이 그 보고 자료를 읽고 내려 보내주면, 비서들은 거기에 적혀 있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조직부의 해당 과 직원이 과학원 원장을 좋지 않게 봤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과학원의 당 비서를 통해 과학원 원장이 사업을 제대로 못한다는 반영자료를 과학원의 가장 권위 있는 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꾸며 김정일에게 보고한다. 그럴 경우, 과학원을 담당한 과학교육비서는 과학원원장을 철직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완전히 조직부의 손에 놀아나는 셈이었고, 한편으로 조직부는 점점 더 독재체계를 강화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김정일은 특히 이런 면에서 한심했다. 훗날 조직부 내에서조차 비판이 제기되어 약간 시정되기는 했지만, 내가 새로운 학습방법을 내놓을 때만 해도 조직부의 보고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으며, 조직부가 사실상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논쟁하는 학습방법에 대해 제동을 건 것도 조직부와 연계를 가지고 있던 나의 반대파 세력이었다. 그리하여 일하면서 논쟁하는 학습방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제도화하려던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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